wordmark wordmark

logo logo

엄마, 부동산이 정말 그렇게 좋아?

Mom, You Sure Do Like The Real Estate

엄마, 부동산이 정말 그렇게 좋아?

Writer.Minji Ma / Illustrator.Subin Yang Article / essay


오랫동안 내 방문에는 부적 같은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빨간색으로 큼지막하게 인쇄된 ‘계약’이라는 단어였다. 엄마는 한 단어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그 위에 삐뚤빼뚤 손 글씨로 ‘우리 집 행복은’이라는 수식어를 더했다.

‘우리 집 행복은 계약’


엄마는 IMF 외환 위기 이후 부동산 텔레마케터로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왔다. 기본 급여가 턱없이 적기 때문에 몇 달 동안 계약서를 쓰지 못하면 월세를 감당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게다가 계약을 몇 달 동안 하지 못하면 바로 해고가 되었다. 그게 이 업계의 룰이었다. 따라서 엄마에게 계약서를 쓴다는 것은 곧 우리 가족의 미래를 지탱해줄 유일한 희망이었다. 엄마는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주중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부동산 개발 정보를 달달 외우고 살았다. 계약서를 쓰는 날이면 엄마는 회사 앞으로 나를 불러다가 외식을 하고 영화를 한 편 보여주었다. 그게 엄마의 행복이었다.

나는 30대 독립 영화 감독이다. 그러다 보니 엄마가 처한 노동환경과 나의 노동환경은 크게 다르지 않다. 늘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 생계 때문에 미래의 전망을 그려보고, 장기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20대 초반에는 무능력한 부모 때문에 나의 삶이 휘청거린다고 생각했다. ‘흙수저’로 태어나서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했고, 늘 아르바이트에 허덕였으며, 싸구려 월세방은 때때로 천장에서 물이 새곤 했다.
당시 나는 부모의 빚과 가난을 절대로 물려받지 않겠다는 결의에 차 있었다. 부모에게서 멀리 떨어져 나만 잘 살면 빚과 가난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으리라. 나는 그렇게 자수성가형 꼰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알고 있었다. 한국 사회는 더 이상 자수성가형 ‘흙수저’가 설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집은 IMF 외환 위기 이전에 중산층이었다. 건설 사업을 하는 권위 있는 가부장 아버지와 내조를 잘하는 현모양처 어머니, 그리고 하나뿐인 외동딸. 우리 세 가족은 40평대 아파트에서 1990년대 중산층 가족이라면 갖춰야 할 모든 조건을 충족하며 살았다. 여름철이면 콘도미디엄에 놀러 갔고, 고급 세단 자동차를 몰았으며, 8mm 홈 비디오로 일상을 꼼꼼히 기록했다. 이 같은 중산층 신화는 영원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IMF 외환 위기 이후 모든 것이 무너져버렸다. 건설 경기가 나빠지면서 아버지의 사업은 눈 깜짝할 사이 추락했고, 엄마는 다른 집 엄마들처럼 곧장 생계 전선에 뛰어들었다. 40평대 아파트는 급매로 넘어갔고, 월세 상가주택으로 이사를 갔다. 마치 몰락한 귀족처럼 커다란 앤티크 가구들을 17평 좁은 월셋집에 안고 살았다. 언젠가 다시 재기해 이 가구들을 제자리에 돌려놓을 수 있을 거라고 가족 구성원 모두 생각했다. 이 상황은 임시적이고 한시적인 비상 상황일 뿐이라고.


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남은 것은 부동산에 대한 희망뿐이었다. 부동산으로 시세 차익을 얻어 중산층 대열에 다시 합류하는 것만이 지금의 심란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처럼 보였다.
누군가는 아파트 몇 채를 사서 뻥튀기를 했다던데, 수도권 역세권 개발이 아직 뜨거운 감자라던데, 요즘은 오피스텔보다 도시형 생활주택이 대세라던데, 저기 그린벨트에 미리 투자를 하는 게 수익이 좋을 텐데···.
당장 월세가 밀리는 한이 있어도 투자는 해야겠다는 것이 부모님의 고집이었다. 물론 투자를 할 만한 현금이 없었기에 이는 말뿐인 공약에 그쳤다. 어느 날 문득, 엄마는 그냥 텔레마케터도 아니고 왜 ‘부동산’ 텔레마케터로 일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부동산이 뭐가 좋다고 부모님은 부동산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걸까? 가족에게서 선을 긋고 멀리 달아나려고 하던 내 발목을 붙잡는 것은 ‘부동산’이라는 단어였다.


부모님은 1970년대 울산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울산 화학 공장 노동자로 일하던 아빠는 월급을 저축해 아파트를 샀다. 그런데 아파트 가격이 2배 가까이 올랐다. 엄마는 주택이 살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사기 위한 재산 증식의 수단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체감했다.
‘투자의 맛’을 본 엄마는 아파트를 팔고 더 큰 아파트를 샀다. 계획대로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아파트값이 올랐고, 엄마는 한 번 더 시세 차익을 얻었다. ‘박정희의 도시’ 울산은 수출 공업화 전략으로 집중 개발이 이루어지던 지역이었다. 엄마는 운이 좋았다고 굳게 믿었다. 시가지에는 새로 공사를 시작한 아파트가 넘쳐났다.
이 무렵 엄마는 서울에 있는 언니에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요즘 건설 사업이 잘된다는 소식이었다. 이모는 월급쟁이로 살지 말고 자본금을 마련해 서울로 올라오라고 두 사람을 설득했다. 3교대 근무로 건강이 나빠진 아빠는 더 이상 아침까지 일하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은 울산 생활을 정리하고 얼마 뒤 서울로 향했다.

주택가에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붉은 벽돌의 다세대주택은 1980년대 ‘집 장사’의 상징이었다. 당시 서울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고, 집은 늘 부족했다. 1970년 서울의 인구는 550만 명이었는데, 1980년에는 840만 명을 돌파했다.
이 시기에 소규모 건설업자인 집 장사는 새롭게 떠오르는 전도유망한 비지니스였다. 이모는 강동구 일대에서 이미 집 장사로 자리를 잡은 상황이었다. 토지를 매매해 집을 짓고 다시 파는, 그야말로 집으로 장사를 하는 사업이었다.
아빠는 이모와 동행하며 부지런히 사업의 노하우를 전수받았고, 엄마는 드로잉 실력을 발휘하며 실내·외 인테리어를 담당했다. 동시에 여러 군데 집을 짓기도 하고, 몇 달에 한 번씩 이사를 다니며 부모님은 부지런히 돈을 벌었다. 약간의 기복은 있었지만, 1997년 전까지 무려 20년 가까이 사업은 큰 탈 없이 굴러갔다.

부모님이 처음 집을 지은 동네는 강동구 천호동과 암사동이었다. 당시 송파구와 강동구 일대는 온통 허허벌판의 공사장이었다. 이 지역에서 연달아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업은 도시 개발의 첫 단추와 같은 일이다. 삐뚤빼뚤 난 도로를 직선 형태로 정비하고 각 구역별로 공공시설, 도시계획 시설 등을 짓는 것이 골자다.
하지만 정부는 주거 문제를 모두 해결할 예산이 충분하지 않았다. 이는 민간 업체들의 몫이 되었다. 즉, 개발이익 역시 사유화되었다는 뜻이다. 규모가 큰 아파트 단지 건설은 대기업 건설사가 맡았고, 남은 주거 지역 택지에는 소규모 건설업자인 집 장사들이 다세대주택을 지었다.


제5공화국에 들어서면 주택 500만 호를 짓겠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는데, 이때 불법으로 증축하거나 개조한 단독주택을 양성화해서 다세대주택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했다. 1984년부터 1985년까지 외부 계단 설치를 허용했고, 지하층 기준을 완화해 반지하가 생겼으며, 민간 주택 사업자 융자 절차를 간소화하는 등 규제를 완화했다. 집 장사들은 토지구획정리사업의 순서를 따라 지역을 옮겨 다니며 집을 지었다.


부모님은 ‘이상하리만치 운이 좋아서’ 돈을 벌 수 있었다고 믿었지만, 주변을 둘러싼 사회구조적 상황 속에서 집 장사는 돈을 벌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버블 패밀리>를 제작하면서 1970년대와 1980년대 뉴스 아카이브 자료를 오랫동안 찾아보았다. 영상 속 한국 사회는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나 ‘중산층’이 될 수 있는 (그것이 거짓 희망일지라도) 미래와 희망으로 가득 찬 세상이었다. 내가 경험해온 한국 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사회였다. 책으로 정보로 글로 오랫동안 알고 있었던 사실인데도 영상 매체로 본 한국 사회는 그 당시의 분위기를 온전히 경험하게 해주었다.

어차피 해도 안 될 거라는 패배 의식이 언제부터 팽배해진 것인지는 너무나 명확하다. IMF 외환 위기 이후 경제 체질이 완전히 변화해 계층 사다리가 존재하지 않는 1%를 위한 곳, 그것이 내가 아는 한국 사회였다.
하지만 부모님이 살아온 한국 사회는 ‘하면 된다, Just Do It’이라는 문장이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기회를 잡는 자에게 돈벼락을 맞는 일은 승률이 높은 게임과 같았으니까.

그리하여 부모님이 살던 한국 사회는 ‘운이 좋으면 부동산을 통해 큰돈을 벌 수 있는’ 과거의 공간이다. 이제 그런 기회는 더 가진 자에게만 주어질 뿐, ‘더 잘 수 있을 거’라는 낙관은 이루어질 리 없는 헛된 희망일 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독한 감독인 나는 일흔이 넘은 부모님에게 이제 그만 암울한 현실을 직시하라고 영화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했지만, 변해야 한다는 말까지는 하지 못했다. 어떻게 변해야 더 잘 살 수 있는 것인지 나도 답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초에 변화의 몫은 실패한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들에게 개인의 실수와 잘못의 책임을 묻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은 아닐까?

스포일러를 하자면, 영화 결말에서 엄마가 나 몰래 내 명의의 땅을 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아주 작은 평수의 땅이지만 처음으로 나에게도 미래에 대한 전망을 그려볼 수 있겠다는 희망이 인생 처음으로 생긴 순간이었다.
무언가 소유해본 적이 없는 나에게 개발이 언제 될지도 모르는 그 땅은 아직 무용지물이지만, 부모님이 붙잡고 있던 희망이 어떤 의미였는지는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만일’ 이 땅이 개발되어 학자금 대출을 한 번에 갚을 수 있다면, 혹시 전세 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면··· 이런 기대감을 나도 모르게 품었기 때문이다.

부동산 불로소득을 통한 자산 증식은 누군가의 몫을 가로채어 생긴 불합리한 행동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내가 소유한 작은 땅은 내 미래를 보장하고 있는 든든한 비밀 무기가 되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부모님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한 가지 배운 교훈이 있다면 개인을 위한 사회적 안전장치는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 사회구조와 더 가진 자들에 의해 언제든 추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내 소유의 땅은 어떤 상징으로만 존재하는 작은 유머처럼 남아 있다. 이제 발 딛고 서 있을 만한 안전한 공간이 허용되지 않은 이곳에서 언젠가 나는 부모님과는 다른 전망을 스스로 그려내고 싶다.



마민지

자본이 도시의 장소와 공간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변화를 만들어내는지 관심을 두고 장소성의 상실과 복원에 대한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한 가족의 경제적 흥망성쇠를 통해 한국 사회의 부동산 개발사를 돌아보는 다큐멘터리 <버블 패밀리>(2017)는 EBS국제다큐영화제 대상을 수상했으며, 2018년 국내 극장 개봉했다. 현재 여성주의를 기반으로 몽골 도시의 풍경을 담아내는 다큐멘터리 <리틀노마드>의 후반 작업을 진행 중이며, 정신장애와 건강권에 대한 이슈를 다루는 세 번째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