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dmark wordmark

logo logo

우리 집에 사는 AI 가전, 동거할 준비 됐나요?

Are you ready to live with AI home appliances?

우리 집에 사는 AI 가전, 동거할 준비 됐나요?

Writer. Minjeong Park / Illustrator. Subin Yang Article / essay




대학을 졸업하고 스물다섯에 리빙 매거진의 에디터가 됐다. 입사 첫 달, 밤을 지새워 원고를 쓰고 동이 틀 무렵에 두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앞으로도 야근을 많이 하겠구나.” “내가 지면에 소개하는 제품을 직접 구매하게 될 일은 (적어도 근 5년 내에) 없겠구나.” 첫 번째는 이 일을 하기로 한 이가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이었고, 두 번째는 패션도 뷰티도 아닌 리빙 에디터이기 때문이라는 조건이 붙었다.
초년생이던 내 월급은 200만 원이 채 안 됐다. 다른 분야의 에디터들은 낭비하지 않고 살면 마틴 마르지엘라가 디자인한 발가락 벌어진 슈즈나 샤넬이 출시한 새 향수를 살 수 있다던데···. 내가 주로 소개하는 건 미끈하게 잘생긴 제주 갈치처럼 반짝이는 냉장고나 에어컨, 청소기 또는 스피커였고, 그것들은 때로 1000만 원을 호가했다. 이런 물건을 살 수 있는 독자와 나를 동일시하는 에디터병에 걸려 있던 어느 시기에는 홍보 담당자에게 “이번 제품은 꽤 합리적인 가격대네요”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순간 그런 말을 하는내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었다.
5년이 지났다. 올해 서른이 됐다. 감사하게도 아직도 리빙 매거진의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입사 첫 달에 한 통찰은 둘 다 틀렸다. 코로나19의 창궐로 재택근무가 늘면서 자연히 야근이 줄었고, 나의 독립으로 내가 지면에 소개한 제품을 직접 구매해야 하는 일도 생겼다.


나는 후암동에 있는 빨간 벽돌집의 11평 남짓한 월세방에서 1인 라이프를 시작했다. 집을 집답게 만드는 데 필요한 온갖 물건 중 가장 큰 예산을 투자해야 하는 건 역시 가전이었다. 내게 필요한 리스트는 이랬다.

냉장고, 세탁기, 전자레인지, 청소기, 물걸레청소기, 에어컨, 커피메이커‧‧‧.


당차게 가전 쇼핑에 나섰다. 어떤 제품이 어떻게 좋은지 잘 알고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최고 제품을 살 수는 없겠지만, 어느 선에서건 괜찮은 선택을 해야지!’라는 결심은 전제부터가 틀린 거였다. 2021년의 가전 매장은 다른 유니버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 세계관에서 발견한 것은 코로나19 사태로 사실상 록다운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한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일하고, 또 즐기는 일상을 어느 정도 유지하기 위한 생존 수단으로 가전을 들인다는 점이었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TV는 내 수면 패턴을 파악해 건강 상태를 체크하고, AI 냉장고는 내부에 어떤 재료가 있는지 관찰해 메뉴를 추천한 다음 매일 먹는 주스가 떨어졌을 때 주문까지 해준다. 반려동물이 있다면 내가 집에 없어도 밥을 챙기고 그들이 남긴 털까지 깨끗하게 청소해준다. 인공지능 세탁기는 또 어떻고. 세탁물의 성격과 무게를 파악해 알아서 회전 횟수와 세탁 시간을 알아서 조절하는 데다 환경을 생각해 적당량의 세제만 쓴다.
이 모든 AI 가전의 구심점에는 ‘가전의 개인화’가 있다. 지금 AI 가전 기술은 일정과 습관을 파악하는 것에서 나아가 부르기 전에 먼저 사용자에게 다가가는 수준까지 발전해있다.


가전의 이런 초첨단화를 직접 체험한 후 나는 모든 걸 깔끔히 포기하기로 했다. 첨단 기술, 엔지니어의 고민, 아름다운 디자인 등을 무지개떡처럼 켜켜이 쌓은 이 가전들은 63빌딩처럼 높은 가격 허들을 만들었다. 인테리어 비용을 아끼기 위해 온몸에 흰 페인트를 묻혀가며 벽을 칠하고, 그 여파로 3일간 팔을 제대로 들지 못한 방 주인과 11평의 구옥은 그를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작은 냉장고와 중고 세탁기, 중고 에어컨을 샀다. 적당한 디자인 및 가격의 전자레인지와 바닥에 닿는 면이 돌아가는 기능만 있는 물걸레 청소기, 가성비 최고라는 중국산 청소기로 만족했다. 물 끓는 소리가 요란한 커피메이커는 밤낮없는 직구 게임 끝에 저렴하게 구했다. 다 괜찮았다. 자비스가 곁에 있다고 아이언맨이 오래오래 행복했던 건 아니잖아.


자취 6개월 차에 접어든 지난달, 나는 결국 AI 가전과의 동거를 선언했다. 큰맘 먹고 알아서 공간을 파악해 청소와 물걸레질까지 해준다는 로봇 청소기와 가약을 맺은 거다. 몇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매일 한 주먹의 머리카락을 흘리고 다니는 사람이고(청소기를 돌리는 중에도 머리카락이 빠진다), 부주의해서 청소를 하다 화분을 깨기 일쑤이며, 데코타일 바닥은 매일 걸레질하지 않으면 발바닥이 까슬하도록 먼지가 잘 앉는다. 그러니까 청소를 하면 하는 대로, 안 하면 안하는 대로 자괴감과 체력적 소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AI 로봇 청소기는 언제나 깨끗한 상태의 마룻바닥으로 만들어주고, 화분은 알아서 피해갔다. AI 가전과의 동거 일주일 만에 얻은 교훈은 ‘가전은 내 삶의 구질구질한 면을 가려주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 나는 섭외가 잘되지 않아 속상한 날에도, 원고가 잘 쓰이지 않아 머리가 아픈 날에도 퇴근 후 바닥이 깨끗한 걸 보고 결심했다. ‘일단 오늘 잘 자고 내일 한 번 더 해보자!’ 나는 웬만해선 인공지능 로봇 청소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기술은 지난 몇 년 새 삶의 모든 문제를 집안에 가만히 앉아서도 해결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개발되는 중이다.
2021년 8월 기준 AI 가전 판매율은 이미 지난해의 총판매량을 한참 넘어섰다. AI 가전이 우리 삶을 더욱 나은 것으로 만들어줄지는 미지수이나, 지금까지 살아온 그대로는 잘 살기 어려워진 것 또한 확실해 보인다. 사용해보지도 않고 ‘나와는 맞지 않아. 하던 대로 하고 살면 돼’라는 것은 안일한 생각일지 모른다. 언젠가는 누구도 이런 변화를 거부할 수 없는 시점이 올 것이다. 디자이너들의 디자이너라 불리는 전설적 산업 디자이너 디터 람스는 “우리는 빠른 것이 필요하지 않다. 더 현명하고 더 나은 것이 필요할 뿐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AI 가전 시대에 무엇이 더 현명하고 나은 것인지를 판단하는 건 디자이너나 기업이 아닌 우리의 몫. 세월이 흐르면 별로인 것은 사라지고 좋은 것은 살아남을 것이다.

어쨌든 인류의 8만 년 역사속에서 인간 박민정이 AI 로봇 청소기를 채택했다. 나는그저 내가 생존하고 번영하길 바랄 뿐이다.






박민정

<리빙센스> 매거진 에디터. 2015년부터 리빙, 인테리어 디자인, 라이프스타일 관련 취재를 하고 원고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