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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뭐 취향이 없나?

What the Taste!

우리가 뭐 취향이 없나?

Writer. Mihwa Lee / Illustrator. Subin Yang Article / essay

오후 6시, 합정동에 자리한 카페 겸 바에서 일을 마치고 나오면 퇴근길에 오른 사람들 틈에서 나의 두 번째 출근이 시작된다. 동대문구 장안동 인적 드문 주택가에 위치한 작은 책방의 문을 열기 위해서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 나는 내 취향에 맞는 책과 영화를 소개하는 서점 ‘영화책방35mm’의 문을 열었다. 벽 사이사이부터 바닥, 가구, 책, 작은 소품 하나까지 내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구석구석 이야기로 빼곡한 공간, 나의 방공호.

책과 비디오 영화를 보며 자란 아이가 꿈꿀 수 있는 가장 근사한 직업은 역시 책방 주인이 아닐까? 어릴 적 꿈이라는 게 쉽게 불타올랐다가 곧잘 식어버리는 속성이었다면, 내게 책방 주인은 은은하게 지속되는 모닥불 같은 꿈이었다. 내 취향의 책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바닥과 책상에 무심히 쌓여 있는 공간.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모닥불 앞에 앉아 불멍을 때리 듯, 미래의 책방을 상상하다 보면 입시나 취업 걱정은 사라지고 온기만이 남곤 했다.

아, 이 얼마나 순진하고 미숙한 망상이었는지‧‧‧. 책방을 열고 난 후 꿈을 이루었다는 감격도 잠시, 현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얼굴로 나타나 뒤통수를 후려쳤다. 책방을 열기 전 작은 여행 전문 서점에서 일하면서 책의 유통 과정이랄지, 판매 마진이랄지 하는 책방 운영의 현실을 충분히 파악했다고 자신했는데, 막상 책을 팔아 번 돈으로 공간을 유지하는 일은 이야기가 달랐다. 그저 손님에게 책을 추천하고, 정리하고, 월급을 받는 책방 직원일 때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월세와의 사투, 그 리얼한 현실은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는 차원의 고민이 아니었다. 해가 지고 내일이 온다는 건 월세 지급일에 하루 더 가까워진다는 걸 의미할 뿐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취향이고 뭐고 책방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몰라.”


책방의 위치, 온라인 서점과의 경쟁 등 실질적 이유야 많았지만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대신 어떻게든 책방을 지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마침 친구가 운영하는 카페의 오픈을 담당해줄 인력이 부족했고, 나는 그렇게 오전에는 합정동의 바리스타로, 저녁에는 장안동의 서점원으로 두 번 출근하는 n잡러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 거였다.
퇴근과 동시에 출근하는 삶. 좋아하는 일을 지속하기 위해, 내 취향을 지키기 위해 나는 몇 개의 직업을 가져야 할까?


“저 집 뺄게요.”
“5만 원 올렸다고 이러는 거니?”
“이것저것 다 올라가니 어쩔 수가 없네요.”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는 일을 늘리는 대신 지출을 덜어내는 방식으로 자신의 취향을 지키는 사람이다. 유일한 안식처인 담배와 위스키를 포기할 수는 없으니 불필요한 고정 지출인 ‘월세’를 줄이는 수밖에. 그러니까 미소가 포기한 건 다름 아닌 ‘집’이다. 물리적‧공간적 안정을 버리고 심리적 안정을 선택한 미소는 친구 집을 옮겨 다니며 디아스포라적 생활을 하기에 이른다.


“나 집 나왔어. 그래서 말인데, 나 좀 재워줄 수 있어?”
“그러니까 너 지금 집이 없다고? 네가 그 정도로 돈이 없어?”
“솔직히 요즘 집세도 오르고 담뱃값도 오르니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잠시 집을 나왔지.”
“미소야, 너 바람 든 것 같다.”
“이게 그렇게 이상한 얘기인가?”
“스탠더드는 아니지. 아니다, 멋있다.”




“취향대로 산다는 거 멋지지. 그렇게 사는 거 아무나 못 하는 거야. 너, 꼭 그 영화 주인공 같다. 담배 피우고 술 마시려고 친구네 집 옮겨 다니면서 기생하는 여자애.”


대학 졸업 후 처음 만난 동기에게 근황을 전하자 돌아온 대답이었다. 맥락으로는 <소공녀>를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어감은 마치 <기생충>을 떠올리게 하는 말투였다. 취향을 걷어낸 미소의 민낯에서 볼 수 있는 건 결국 기생인 걸까.
따지고 보면 <소공녀>의 영어 제목 ‘Microhabitat’는 미소 생물이 서식할 수 있는 환경 조건을 갖춘 ‘미소 서식지’를 의미한다. 미소 생물이 일정 부분 숙주와 기생 관계를 유지한다고 했을 때, 미소가 고수하려는 취향에는 얼마간의 기생이 따른다는 걸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나 그냥 솔직하게 말할게, 미소야.
나는 네가 염치없다고 생각해.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술‧담배라는 것도 솔직히 진짜 한심하고.
그것 때문에 집도 하나 못 구해가지고 우리 집에서 지내면서
그런 것까지 다 이해해주길 바라는 네가
뭔가 좀 잘못됐다는 생각 안 드니?”


미안한 일이지만 “담배 피우고 술 마시려고 친구네 집 옮겨 다니면서 기생하는 여자애” 같다는 동기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궁극적으로 미소나 나나 취향을 지키겠다는 목표는 같지만, 방식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취향을 지키기 위해 집(현실)을 포기하는 부류는 아니다. 오히려 아등바등 현실에 빌붙어 사는 사람에 가깝다. 친구 집에 기생하면서 취향을 고수하느니 일을 하나 더 늘리는 사람,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더 많이 하는 사람이다.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자립할 수 없다면 취향도 지킬 수 없다.


미소가 염치없다는 말을 들은 건 친구 집에 얹혀살려고 했기 때문이다. 미소가 지키려는 취향의 종류는 그게 위스키든 담배든 전혀 문제 될 게 없지만, 누군가의 도움으로 유지하는 취향이라면 참견과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책방은 늘 가난하다. 조금 덜 가난해지기 위해 n개의 일을 시도할 뿐, 두 번의 출퇴근을 반복하면서도 풍요로웠던 적은 하루도 없었다. 어느 책방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남 일 같지 않아 아주 불안해진다. 나는 언제까지 취향을, 좋아하는 일을 지속할 수 있을까?

신기한 건 “그렇게 사는 거 아무나 못 하는 거야”라는 동기의 말이 이상하게 위로가 된다는 거다. 그의 말투에 빈정거림이 섞여 있었던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살기 위해 오늘도 출근과 퇴근을 반복한다. 지는 게 확실한 팀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귀에 이어폰을 꽂고 집으로 향하는 두 번째 퇴근길을 씩씩하게 걷는다.


하지만 나는 아직 여기 그나마는 아직 버틸 만한 하루
그래도 나는 기억하네 아직 꿈을 꾸네.
꿈꾸며 사는 건 어쨌거나 좋아요.
나의 서운한 오늘이 내일을 꿈꾸네.

-신치림, ‘퇴근길’



이미화

 길을 잃는다. 삶의 방향도 마찬가지다. 독일 베를린에서 보낸 3년의 시간을 엮어낸 에세이 베를린 다이어리 영화 배경으로 여행을 떠난 기록 당신이 나와 같은 시간 속에 있기를 출간했다. 우리 각자의 인생은 편의 영화이자 권의 책이라 믿으며영화책방35mm’ 운영해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