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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메뉴’가 말합니다

Today’s Menu Says

‘오늘의 메뉴’가 말합니다

Writer.Hanbyeol Jo / Illustrator.Subin Yang Article / essay


돌이켜보면 내게 ‘오늘의 메뉴’는 교복 같은 것이었다. 매일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나의 의지와 크게 상관이 없었으며,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엄마가 혹은 급식소 영양 선생님이 차려준 대로 먹기만 하면 됐다. 그때의 끼니는 때가 되면 ‘따박따박’ 나오는 것이었다. 깊이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메뉴를 고민하고 판단하며 선택하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니었다. 그때 우리는 별생각 없이 똑같은 식판에 똑같은 메뉴를 똑같은 양만큼 흡입하며 자랐다. 


무지하고 게으른 초짜에게 주어진 자유의 민낯

대학 신입생 시절, 처음으로 집과 학교의 관리 감독에서 벗어나 혼자의 일상을 꾸리게 되었다. 유흥의 자유, 관계의 자유와 더불어 얻은 또 다른 자유는 메뉴 선택의 자유였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얻은 자유를 마음껏 누리지 못했다.

자취의 꿈으로 가득 찬 초기에는 매일 예쁜 식탁에서 여유롭게 식사를 즐기는 로망 같은 게 있었다. 그러나 막상 뭔가를 차려 먹으려고 할 때마다 불쑥 튀어나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무지의 얼굴이었다. 메뉴를 고민하고 선택하는 것이 온전히 나의 몫이 되었지만, 경험도 지식도 뚜렷한 취향도 없던 나는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버둥댔다.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요리라곤 너무 뻔하고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독립한 지 1년이 채 안 되던 때, 꽤 성공적이던 된장찌개를 기점으로 자취의 로망을 접기로 했다. 집밥 잠정 중단 선언.

된장찌개가 맛있게 끓여진 날이었다. 조금 남은 찌개를 버리기 아까워 다음 날 또 먹을 생각에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두었는데, 연이은 저녁 약속으로 그대로 방치해버렸다. 그렇게 2주가 흘렀을까, 언젠가부터 방 안에 하얀 쌀알들이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이게 왜 여깄지?” 손가락으로 집었는데 ‘톡!’ 하고 터졌다. 순간 등골이 오싹! 그건 쌀알이 아니라 구더기였다. 된장찌개가 썩고 썩어 냄비는 결국 구더기의 출생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엄마아아아아~” 구더기가 무서웠고, 생각지 못한 음식의 배신이 무서웠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냐고? 그래, 구더기 무서워서 음식 못 하겠다! 메뉴 선택의 기쁨? 그런 건 메뉴판이 있는 식당에서나 누릴 테다!(훌쩍)

집 밖에서 모든 끼니를 해결하니 식재료가 썩을 일도, 정체 모를 냄새를 맡을 일도 없어서 좋았다. 그런데 사람은 참 쉽게 잊고 변한다. 나는 식당을 전전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짜고, 달고, 맵고, 기름진 것만 먹고 살 거야?” “매일 이렇게 하다간 통장이 남아나지 않겠어!”

바깥 밥이 질릴 무렵 다시 주방에서 뭔가를 만들어보기로 결심했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생활 또한 오래가진 못했다. 할 줄 아는 것과 편리함 사이에서 구현할 수 있는 메뉴의 가짓수는 매우 적었고 그래서 슬슬 지겨워졌다.


독립과 함께 얻은 자유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후회와 다짐, 도전과 후회를 반복하며 원룸 주방과 원룸 앞 식당을 오갔다. ‘이럴 바엔 따박따박 나왔던 그때가 좋았지’라고 그리워해 보지만 소용없는 일. 이제부터 나는 쭉 혼자일 거고, 누구도 나의 끼니를 챙겨주지 않는다는 걸 안다. 정녕 이렇게 해서 나는 잘 살아낼 수 있을까? 나를 잘 먹이는 방법도 모르는 주제에 나는 나를 잘 보살필 수 있을까? 그때 나는 독립 이후 처음 두려움을 느꼈다. 



‘오늘의 메뉴’는 오늘도 진화 중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그때의 두려움 때문인지 나는 나를 먹이는 일에 좀 더 관심을 두게 됐고, 결국 음식 이야기를 만들고 전하는 일을 하게 됐다. 푸드 에디터로 일하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지만, 특히 음식에 대해 다양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 경험을 하면서 나의 생각과 생활은 차츰 정리되어갔다. 그렇게 5년이 흘렀을까, 그제야 나만의 메뉴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방식·기준·취향·노하우 같은 것이 생기는 듯했다.

독립 이후 방황기를 보내던 나의 20대 시절과 비교하면 세상은 너무 많이 변했다. ‘오늘의 메뉴’를 고르기 위한 선택지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아졌고, 그런 만큼 사람들은 ‘먹는 것’에 대해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방법으로 소비하게 됐다. 다른 사람이 먹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기도 하고, 먹은 뒤 주변 사람들과 열띤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동물권·환경보호·건강 등 고유의 철학과 세계관을 담아 행동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표출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욕구와 생각을 반영한 이야기가 공존하는 가운데 디지털 기술과 배송 기술의 발전이 더해져 우리의 식문화는 전에 없는 부흥기를 맞았다.

대세는 역시 배달 앱이다. 세상만사 귀찮을 때 이만큼 편리한 것이 없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바로 눈앞에 외식 메뉴가 찾아온다. 삼겹살부터 파스타, 디저트까지 거의 모든 외식 메뉴를 망라하며 배달 음식의 스펙트럼이 획기적으로 확장됐다.

F&B 기업에서는 1인 가구와 맞벌이 가정을 위한 간편식(HMR) 제품을 꾸준히 출시하고 있다.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거나 팩만 뜯어서 열 조리하면 바로 먹을 수 있는데, 삼계탕·육개장·미역국· 곰탕 등 한식은 물론 덮밥·컵밥 등 한 그릇 음식까지 메뉴 구성이 꽤 다양하고 호화롭다. 그중에서도 특히 빛을 보는 것은 편의점 간편식이다. 사람들은 SNS상에서 자기만의 편의점 레시피를 공유한다.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간편식 제품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합해 기성품의 고정된 맛을 뛰어넘어 새로운 맛과 재미를 창조해간다. 이들에겐 식사가 놀이와 재미가 된다.

‘요리하고 식사하는 방식이 바뀐다면 집밥이 좀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CJ에서 운영하는 밀키트 브랜드 ‘CJ쿡킷’의 슬로건처럼 밀키트는 새로운 집밥 문화를 제안한다. 밀키트는 일반 간편식과 달리 한 끼 식사 분량에 맞춰 손질한 식재료와 양념 등을 구성한 상품. 메뉴와 조리법에 따라 어떤 재료가 얼마나 필요한지 고민하지 않고 조리만 하면 된다. 따로 장 보는 시간과 노동력을 줄이면서 집밥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프레시지’, ‘심플리쿡’, ‘잇츠온’, ‘집반찬연구소’, ‘마이셰프’ 등 밀키트 전문 브랜드는 각자 다양한 콘셉트로 만든 기획 상품을 내놓기도 하고, 마라탕· 뿌빳뽕커리·탄탄면처럼 집에서는 쉽게 만들 수 없는 외국식 메뉴도 제공한다. 집밥은 먹고 싶지만 요리가 서툰 사람에게 밥상 차리는 일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주고, 퇴근해 돌아와 바로 식사를 준비할 때의 막막함, 남은 식재료를 처치할 때의 피로감 역시 줄여준다.

식재료부터 믿을 수 있는 것으로 챙겨 먹어야 한다는 이들은 채소 꾸러미를 이용하기도 한다. ‘무릉외갓집’, ‘언니네 텃밭’의 정기 배송 서비스가 대표적인데, 제철에 수확한 채소와 과일 등 신선한 식재료를 매달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산지에서 갓 딴 식재료는 긴 유통 과정을 거쳐 매대에 올라온 마트의 식재료보다 훨씬 신선하고, 저농약 혹은 무농약으로 키워 건강하며, 제철 식재료인 만큼 좀 더 많은 영양을 섭취할 수 있다.



집 밖에서도 메뉴 고민은 계속된다. 특히 일반 식당에서는 쉽게 충족할 수 없는 특별한 메뉴 선택의 기준을 가진 이들에겐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도시락 배송 서비스다. ‘프레시 코드’, ‘포켓 샐러드’, ‘샐러딩’은 샐러드 도시락만 전문으로 한다. 매번 소스와 토핑 재료를 달리 구성해 맛있고 배부른 샐러드 식단을 제공하는 것. 다이어트 중인 사람은 물론 비건 라이프를 지향하는 이에게도 인기가 좋다. ‘아임웰’, ‘포켓라이스’도 도시락 배송 서비스를 운영하는데, 이들의 핵심은 건강한 밥이다. 매일 다른 곡물, 건강 재료로 만든 영양밥과 반찬으로 구성한 저칼로리 건강 도시락 서비스는 그나마도 뻔한 점심 메뉴를 고민할 필요 없이 매일 다양한 메뉴를 즐기고, 건강한 식단을 이어가도록 돕는다.

비건 인구가 늘어나면서 비건 식재료를 취급하는 곳도 많아졌다. 온라인 식재료 쇼핑몰 ‘헬로네이처’에서는 ‘비건존’을 오픈해 비건을 위한 장보기 서비스를 특화했다. 동물성 재료 없이 만든 김치, 만두, 수프 등 음식은 물론 생활용품도 두루 갖췄다. 서울 내 채식 레스토랑을 소개하는 앱 ‘채식한끼’의 활약도 눈에 띈다.

상품과 서비스보다 메뉴 선택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음식 콘텐츠다. 그중에서도 먹방과 밀프렙 콘텐츠는 꽤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먹방에서는 많은 양의 음식이나 참기 힘들 정도로 매운 음식을 먹는 등 미각과 청각을 극대화하며 음식을 단순히 감각을 자극하는 도구로 활용하는 반면, 일정 기간 먹을 음식을 한 번에 준비해두고 보관 용기에 넣어 필요할 때마다 꺼내 먹을 수 있도록 소분하는 밀프렙 관련 콘텐츠는 건강한 삶을 지속하기 위한 도구로서 음식을 다룬다. 사람들은 먹방을 통해 먹고 싶은 욕구를 달래고, 밀프렙 영상을 통해 칼로리나 식재료의 성분 등을 따져 자신이 원하는 식단을 실천하는 팁을 얻는다. 이렇게 정반대 성격을 지닌 콘텐츠가 모두 사랑받고 있다는 현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정말이지 인류 역사상 음식 관련 콘텐츠와 상품이 이렇게 많던 적이 있었나 싶다. 하지만 나는 이토록 무수히 많은 선택지가 그리 반갑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안다. 갑자기 혼자서 많은 것을 선택해내야 하는 상황이 누군가에겐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다. 경험도, 지식도, 뚜렷한 취향도 없는 가운데 주어지는 자유가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것인지, 어쩌면 구더기와 대면하는 공포 체험을 맞닥뜨리게 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집과 학교의 지붕에서 벗어난 이상 ‘따박따박’ 나오는 오늘의 메뉴 따윈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더 이상 우리는 똑같은 식판에 담은 똑같은 메뉴를 먹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어떻게 오늘의 메뉴를 채울 것인가?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괜찮다. 나는 매일의 끼니를 운용하는 방법을 찾고 익숙해지기까지 5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그러니 우리, 마음을 비우고 장기전으로 돌입해보자. 후회를 동반하더라도 원하는 선택지는 모두 겪어보는 거다. 그중에 꽤 잘 맞고 괜찮은 것을 발견할 수도 있는 일이다. 아니면 또 어떤가. 다시 말하지만 서두를 필요 없다. 경험이 쌓이는 만큼 길은 조금씩 더 뚜렷해질 테니까.

나를 먹이는 일은 죽을 때까지 가져가야 할 생존의 문제인 동시에 기분이나 컨디션 같은 일상의 결을 좌우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름의 방법을 찾고 터득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지만, 그럼으로써 자신만의 방식대로 건강한 삶을 꾸리는 길을 찾는 과정이기에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부디 절망과 도전, 후회의 모든 과정을 겪으며 혼자서도 잘 살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다가 문득 만족스러운 한 끼가 얻어걸리면 좋겠고, 그렇게 얻은 기분 좋은 한 끼 한 끼가 모여 꽤 괜찮은 일상의 결을 만들어가면 더할 나위 없겠다.

그나저나 다들, 오늘의 메뉴는 정하셨는지?



조한별

매거진의 푸드 에디터로 일했다. 최신 트렌드보다 사람들의 흔적이 담긴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좋아한다. 끼니를 함께하는 사람이 있다는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도 알게 됐다. 그래서 결혼식 청첩장의 타이틀도食口(식구)’ 정하고, 처음 출간한 《이렇게 사는 무슨 소용이람》에서도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먹은 음식 이야기를 담았다. 지금도이렇게 사는 무슨 소용일까?’ 하는 생각이 때마다 누군가와 함께 먹는 밥상에서 위로를 받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