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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의 유구한 역사

The Rich History of My Refrigerator

냉장고의 유구한 역사

Writer.Heji Kim / Illustrator.Subin Yang Article / essay

“언니 오늘 집에 가면 뭐 먹어?”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은 동료들에게 퇴근길마다 물어보는 요즘 나의 질문이다. ‘대체 사람들은 저녁에 뭘 먹지?’ 정말 요즘 내 인생 최대이자 최다 고민인데 같은 방향으로 퇴근하는 두 분의 답은 특별한 약속이 없는 한 늘 같다.
“그냥 집에 있는 걸로 먹게.”
이 답변은 나에게 ‘오늘 저녁에 뭐 먹지’ 하는 고민만큼이나 풀기 어려운 미스터리인데, 대체 집에 그냥 있는 게 뭐지? 그건 어떻게 그냥 있을 수 있지? 아니 그게 상하지 않고 꺼내 먹을 수 있을 만큼 아직 잘 있단 말이야? 보통 장을 어떻게 보는지 무엇을 해 먹는지 물어봐도 나와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은데, 무언가 다른 ‘저녁밥’을 만나고 있다. 

동료 중 한 명은 결혼했고 또 다른 한 명은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데, 혼자 거의 10년째 살고 있는 나의 이 매일 같은 저녁 고민과 그들의 고민은 왠지 모르게 다르다.

올해 초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 왔다. 부모님 집에서 독립한 후 인생 처음으로 거실이 있는 집, 방과 부엌이 분리된 집, 투룸으로 이사 오게 됐다. 오래전부터 내가 사는 모습을 봐온 친구가 집들이로 방문했다 왠지 자기가 너무 감격스럽다며 눈물을 찔끔 흘릴 정도로 나에게도 주거 환경의 큰 변화였다. 넓은 집에는 좀 더 넓은 부엌이 있고 기쁜 마음에 냉장고도 좀 더 큰 걸로 구매하고, 갖가지 뽀얀 그릇을 사며 가끔 인스타그램에 올릴 상상도 했지.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화장품 냉장고, 언제 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말라비틀어진 각종 채소들…. 재료들은 백 번 사면 정말 백 번 다 남았고 다 버렸다. 포르투갈 여행에서 기꺼이 사 와 한 입 먹고 남긴 통조림 정어리도 결국 곰팡이와 함께 스러져버렸다. 그나마 술과 술안주는 열심히 먹으니 그런 날 믿고 대서양에서부터 사 온 것이었는데 이마저도 곰팡이와 함께 썩어갔다.


약간의 변명을 하자면 나는 요리를 못하는 사람은 절대 아니다. 정말로! 대략 10년 정도의 자취 역사와 더불어 내 냉장고의 역사도 유구하다. 

시간이 그렇게 차고 넘치는지 몰랐던 대학생 시절, 친구와 살던 투룸에서 옵션으로 붙어 있던 큰 가정용 냉장고에 식재료를 매번 채워두고 밥을 해 먹었다. 심심하면 대학교 친구들을 불러 밥을 ‘해 먹였’다. 대학교 근처 자취촌이라 큰 마트도 많았고 시간도 많았고 내 안의 요리에 대한 열정도 많았다. 살인적인 물가를 자랑하는 스웨덴에 교환학생으로 갔던 시절엔 반대로 식재료가 저렴해 반강제로 요리를 주야장천 했어야만 했다. 같은 기숙사 건물을 쓰던 한국인 친구들에게 요리사로 불리던 나였는데….


직장인이 되고 돈을 벌고 더 넓은 곳에 살게 되면서 상황은 나아질 줄 알았다. 그러나 돈은 있고 시간이 부족한 직장인은 결국 배달에 눈을 돌리게 됐다. ‘배달의 민족’, ‘요기요’뿐 아니라 요즘 우리 동네의 신흥 강자로 뜬 ‘쿠팡 이츠’며 새롭고 신박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배달 플랫폼들에 지갑만 신나게 털리고 있다. 지금보다 훨씬 좁긴 했지만 회사 근처이던 이전 집에서는 정시 퇴근을 하고 집에 도착하면 6시 반 정도였으니 요리를 할 만했다. 게다가 당시 집 근처엔 나 같은 1인 가구가 사는 집이 많아 근처 편의점에서는 식재료를 소분해서 팔기도 했다. 그런 재료를 사 와 한 번이나 두 번 정도 먹을 음식을 요리해 먹었다. 에어프라이어를 큰맘 먹고 사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에프’ 사용 꿀팁 짤을 저장해두고 뭐든 넣어 돌려보기도 했다. 재료가 조금 남으면 다음날 또 일찍 ‘정퇴’하고 달려와 음식을 해 먹으면 됐다.

그러나 치솟는 주거 비용을 감당할 수 없던 서울의 흔한 직장인은 회사에서 더 먼 곳으로 자리 잡게 됐는데 그게 지금의 집이다. 지금은 ‘정퇴’하고 정말 빠르게 걷고 빠르게 버스를 타고 와도 집에 도착하면 보통 7시가 넘는다. 재료를 사 다듬고 요리하고 먹고 설거지를 하고 나면 마치 내 하루가 몽땅 날아가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으니 점점 열정이 사라져갔다. 마치 저녁만 있는 삶이고 밤은 없는 삶처럼 느껴진다는 것. 집이 회사에서 더 멀어진 탓에 더 일찍 일어나야 하니 그만큼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빨라진 것도 한몫했다. 게다가 지금 사는 집 근처에는 식재료를 적은 양으로 파는 마트가 없다 보니 재료들이 대체로 비싸고 또 애매하게 남는다. 이런저런 이유로 점점 요리 열정은 사라지고 집에 오면 입맛을 잃어버리는 기이한 현상을 겪었다. 그냥 요리를 하기도 귀찮고 먹기도 귀찮고 피곤하고 힘들고. 이러니 점점 식욕이 사라지고 더 요리를 하지 않게 되는 악순환에 빠져들었다. 식욕이 없어지다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도 평범한 사람처럼 먹어보기나 하자는 마음에 탕이나 찌개류를 배달해주는 백반집에서 음식을 주문하기도 했다. 이런 가게들은 저렴하기도 하고 양이 많은 편이라 한번 시키고 남은 걸 다시 끓인 뒤 냉동 보관하면 언제든 필요할 때 꺼내 먹을 수 있다. 마치 엄마의 요리를 배달로 사는 느낌이랄까. 그러나 운이 좋아야 맛있지 어떤 가게는 우리 엄마 표현대로 “니 맛도 내 맛도 없다”. 게다가 주말 동안 차곡차곡 쌓여간 플라스틱 그릇들을 버리면서 죄책감에 시달린다. 다음엔 거북이 코가 아닌 내 코에 플라스틱 뚜껑이 꽂히는 날이 오겠지. 이렇게 버려진 플라스틱 통들은 잘게 부서져 미세플라스틱이 돼 다음에 내가 먹을 밥에 양념으로 얹히겠지. 미친 소리가 아닌 게 세계 전체 바다 소금의 90%에서 미세플라스틱이 검출됐다. 하루 평균 소금 섭취량을 기준으로 하면 1인당 매년 2000개의 미세플라스틱을 먹고 있다. 가까이로는 중국산 천일염에서도 발견됐다. 중국산 소금이나 한국산 소금이나. 


지난달 카드 내역서 배달비를 보니 얼마나 많은 플라스틱을 버렸는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카페에서 음료를 살 때도 플라스틱 컵과 빨대 사용을 지양하고 평소에 최대한 물티슈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나인데, 집에서 쌓여가는 배달 통들을 보면 더 큰 죄책감을 느낀다.



그래, 이 모든 문제의 답을 이미 나도 알고, 다들 알고 있다. 내 최애 영화 <모아나>에서 주인공인 모아나가 불로 뒤덮인 용암 악마 ‘테 카’의 심장에 소용돌이 문양을 박아 테 카를 다시 창조신인 ‘테 피티’로 변신시켰듯이, 나도 내 음쓰 냉장고가 풍요로운 냉장고가 되도록 기본 재료들을 채워 넣으면 된다. 대신 썩지 않게 할 방법만 고민하면 된다. 우선 우리 집 냉장고는 음쓰 통 시절일 때부터 국간장, 진간장, 소금 등 각종 양념은 모두 있었다. 언제든 요리할 준비가 됐다는 마음가짐을 보여주는 최소한의 노력이랄까. 바쁜 직장인에게 매일 재료를 사고 다듬어 요리할 시간은 없으니 그 대신 주말에 재료를 몰아 사 다듬고 양념들과 함께 소분해 종이컵에 담아 냉동실에 얼린다. 이렇게 하면 평일에 퇴근 후에도 마치 즉석식품을 요리하듯 바로바로 요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종이컵에 깍둑썰기한 두부와 반원 모양으로 썬 애호박, 그리고 집된장, 고춧가루, 대파, 다시마, 다시다 등을 넣어 얼린 걸 꺼내 뚝배기나 냄비 그릇에 담고 물을 부어 끓이면 오래 걸리지 않아 된장찌개가 완성된다. 응용 버전으로 김치찌개나 소고기뭇국 등이 있는데 이런 종류의 국은 얼린 재료를 잠깐만 기름에 볶고 물과 함께 끓이면 된다. 전자레인지에서 3분이면 끝나는 즉석식품보다는 쬐금 더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맛있다. 이렇게 요리하면 아무리 사 온 재료가 많아도 썩혀서 버리지 않고 모두 먹을 수 있다.

이때 함께 먹는 밥도 주말에 전기밥솥으로 한가득 지은 밥을 소분해 전자레인지 전용 용기에 1인 분씩 담아 냉동실에 얼려둔 걸 꺼내 해동하면 된다. 갓 지은 밥을 이렇게 얼리면 해동했을 때 냉동실에 아주 오래 보관한 게 아니고서야 갓 지은 밥처럼 정말 맛있다. 여기서 팁은 밥을 지을 때 평소 바로 먹는 밥보다 물을 조금 더 많이 넣으면 좋고, 얼릴 타이밍은 최대한 밥을 짓자마자 바로 담아 얼리면 좋다. 이것도 귀찮으면 주말에 국물류의 요리를 만든 다음 소분해 전자레인지 전용 통이나 봉지에 담아 냉동실에 얼려두고 퇴근 후 하나씩 꺼내 데워 먹으면 된다. 이건 정말 편의점 즉석식품만큼의 시간밖에 안 걸린다.

매번 퇴근길 나의 ‘오늘 뭐 먹지?’를 듣던 회사의 동료가 조금 다른 방식의 ‘냉장고 파먹기’ 방법을 조언해줘 시도해보기도 했다. 요리를 해 먹고 남은 식재료를 거창한 요리를 할 때까지 남겨두지 말고, 있는 재료로만 요리를 해보라는 거였다. 동료는 매번 어떤 요리를 할지 생각하다 집에 있는 재료가 부족하다고 으레 포기하지 않고, 있는 재료로 간단한 요리라도 해 먹는 방법을 계속 고민한다는 거였다. 한 가지 식재료가 부족하더라도 냉장고 파먹기에 의의를 두며 남은 재료를 몽땅 쓸 수 있는 요리를 해보는 건데, 이런 경험이 반복되다 보면 냉장고에 오래 남겨두다 버려질 걸 걱정하지 않으며 다양한 식재료를 살 수 있게 된다. 이런저런 노하우를 모아놓은 덕분에 지금 나의 냉장고는 음쓰 통만은 아니다.


요리할 때마다 새삼 느낀다. 나만의 공간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가운데 칼로 재료를 써는 소리, 냄비에서 찌개가 보글보글 끓는 소리, 밥을 갓 지은 밥솥을 열었을 때 압력이 빠지는 소리를 듣는 건 일종의 명상과도 같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내 입맛에 맞게 건강하게 요리하기. 하루를 마치고 정성 들여 지은 한 끼를 재밌는 드라마를 보며 먹고 나면 고생한 나에게 주는 보상처럼 느껴진다. 그 기쁨이 좋아 요리를 가끔 시도하지만 물론 쉽지는 않다.
이 글을 쓰다가 잠시 굴과 달걀을 사 와 부침가루를 더해 굴전을 해 먹었다. 남은 굴은 저녁에 소금과 매운 고춧가루, 다진 마늘 조금과 얼린 파를 넣어 조물조물 무쳐 먹어야지. 생굴무침은 매콤하고 짭짤하게 만들면 한 끼 뚝딱 할 수 있는 밥도둑이다. 남은 달걀은 프라이로 하나 올려야지. 솔직히 지금 이 순간도 버튼 하나만 누르면 찾아오는 배달 음식의 유혹을 쉽게 포기할 수 없지만, 냉장고에 잔뜩 담겨 있는 재료들을 떠올리며 오늘의 끼니를 어떻게든 해결해보려 한다. 미세플라스틱이 되어 내 몸에 쌓이는 걸 그대로 두고 싶지 않으니까, 더 이상 냉장고를 음쓰 통으로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김혜지

서울로 올라온 지 10년이 넘었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월세에 허덕이다가 가까스로 정규직이 되었고, 이제는 전세 자금 대출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혼자 먹고 사는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일인분 생활자>를 통해 리얼한 자취생의 주거 환경과 일상의 에피소드를 유쾌하게 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