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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집

The House of Choice

선택의 집

Editor.Hyein Lee Article / mixtape

집을 정의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잠만 자는 곳으로, 누군가는 유일한 안식처로, 또 누군가는 부의 척도로 여긴다. 여기, 네 편의 영화가 무심코 지나쳐온 집의 의미를 귀띔해준다.




포기할 권리 <소공녀>
나는 집을 포기할 수 있을까? 아니, 일단 이 집도 내 집이 아니지만 포기할 이유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되며 어떻게 하면 지켜낼 수 있을지 모색할 뿐이다. 어쩌면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서머싯 몸이 이를 알고 작품 제목을 ‘인간의 굴레’라 지었던가. 이건 돈벼락을 맞지 않고서야 벗어날 수 없는 그야말로 인간의 굴레다.
그러나 방법만 생각한다면 포기라는 건 정말이지 쉽다. 용기만 있으면 되는 일이다. <소공녀>의 미소를 보면 이해가 빠르다. 자그마한 방에서 바퀴벌레와 함께 생활하는 미소는 어느 날 집주인이 월세 5만 원을 올리자 방을 빼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그녀가 월셋방을 포기하고 지켜낸 것은 위스키, 담배, 한약(약을 먹지 않으면 미소의 머리는 백발이 된다). 그녀의 직업은 가사도우미이며, 일당은 4만5000원이다.
짐과 달걀 한 판을 든 미소는 밴드 시절 친구들의 집에 찾아간다. 며칠 묵으면 좋으련만 어째 친구라는 것들의 사정도 그리 좋지 않다. 상사에게 시달리며 점심시간에 셀프 포도당 주사를 맞는 친구1, 결혼과 동시에 살림에 찌든 친구2, 아내에게 버림받아 눈물로 지새우는 친구3, 결혼하기만 바라는 늙은 부모와 함께 사는 친구4, 그리고 화려하던 과거를 숨기고 부잣집 귀부인이 된 친구5까지. 그래도 마지막 친구네에선 며칠 지낼 수 있었는데, 그만 남편 앞에서 과거 이야기를 하는 미소에게 화가 난 친구가 폭언을 한다. “나는 네가 염치가 없다고 생각해.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술, 담배라는 것도 솔직히 진짜 한심하고.”
미소가 집에서 밖으로, 계속해서 외곽으로 밀려날수록 나는 확신했다. 생의 깊은 안쪽에 서 있는 건 다름 아닌 그녀라고. 나는 그녀처럼 원하는 것을 나열해봤다. 맥북 에어, 라이카 흑백 전용 카메라, 해가 잘 드는 작업실…. 당장 손에 넣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미소는 요약된 행복을 눈앞에 불러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불확실한 미래보다 단 한 번의 지금이 중요한 사람이었다. 어떤 이는 미소를 보며 철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혀끝을 차면서도 뒤늦게 고이는 씁쓸함은 숨길 수 없을 것이다. 미소의 표표한 행적이 우리에게 의문을 던진다. 집을 소유하기에 급급한 우리는 사실 집의 소유가 되어가는 게 아닐까 하고.


 


한바탕 숲속의 꿈 <킹 오브 썸머>
세 명의 소년이 있다. 그들은 어느 날 집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조이는 돌아가신 엄마와의 추억을 존중하지 않는 아버지에게서, 패트릭은 두드러기가 날 만큼 지나친 부모의 관심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별종인 비아지오는… 아직까지 이 친구의 가출 이유는 모르겠다. 아무튼 이 세 친구가 모여 숲속에 집을 짓는다. 공사장에서 훔쳐온 목재와 길에서 주워온 것들로 꽤 아늑한 아지트를 완성한다. 비록 비가 오면 속수무책으로 젖어야 하지만.
문을 열면 바로 자연이다. 조금만 경사를 오르면 울창한 나무를 내려다볼 수 있고, 더우면 옷을 홀라당 벗고 강가로 뛰어내릴 수도 있다. 시계는 볼 필요가 없다. 해가 높이 떠 있으면 낮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해가 지면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형편없는 요리를 먹는다. 종종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도로 옆 마트에서 치킨을 사 먹기도 한다.
영화는 가출이라는 흔한 소재를 사용하지만, 단지 떠남에 만족하지 않고 머무름의 요건을 말한다. 공간에 대한 애정은 물론, 그곳을 구성하는 이들의 균형을 강조한다. 하지만 짓궂게도 여자 친구 한 명을 등장시키면서 두 소년의 우정을 시험한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집을 가꾸는 과정이 사람 간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방치하면 방치할수록 상황은 악화되고,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삶의 진리를 보여준다. 소년들은 그 과정을 한여름에 다 소화시킨다. 자신이 무엇을 경험했는지 뒤돌아보고 나서야 깨닫는다.
결국 망나니 같던 소년들도 더위가 한풀 꺾인 늦여름의 모양새로 집에 돌아간다.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던 가족을 다시 받아들이고, 찌질했던 우정의 민낯을 이해한다. 어느새 제법 성숙한 표정을 지을 줄 아는 소년들. 나는 그때 짓궂은 어른의 얼굴로 묻고 싶었다. “수고했어. 그래도 집이 최고지?”





잘 기억하기 위한 기록 <집의 시간들>
둔촌주공아파트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 나는 주공아파트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높고 세련된 아파트들 사이에 홀로 덜 자란 듯한 주공아파트에 자꾸만 마음이 간다. 그중에서 둔촌주공아파트를 가장 좋아하고, 그곳에 대해 가장 많이 안다. 다큐멘터리 <집의 시간들> 덕분이다.
영화는 멀리 조망한 사람을 제외하고 인물을 등장시키지 않는다. 얼마간 정지된 상태로 집의 풍경을 보여주면서 그곳에 사는 인물의 목소리만 들려준다. 나는 감독의 연출에 무릎을 탁 쳤다. 만약 인물이 등장했다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집이 아니었을 테니까. 조용히 흐르는 낯선 집의 시간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곳에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 내게도 그런 추억이 있는 것만 같다. 베란다에 나가면 눈이 마주치는 나무들, 경계도 없이 활짝 열어놓은 현관문, 그 사이로 들리는 하교하는 아이들 소리…. 살면서 한 번쯤 마음을 뺏긴 장면이기에 이 영화의 끝은 이미 애틋할 수밖에 없다.
둔촌주공아파트는 1980년에 완공해 현재 재개발로 이주와 철거가 모두 진행된 상태다. 화면 속 주민들은 약 19년 전부터 야기되던 재개발이 현실로 벌어지자 얼떨떨해하면서도 헤어짐을 인정하는 느낌이었다. 서울에서, 그것도 아파트 단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녹지를 일상으로 감각할 수 없다는 게 아쉽지만, 그래도 잘 살았으니 그걸로 되었다는 듯.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그 고요한 풍경을 지켜보고 있으면 아주 낯설면서도 익숙한 이 집의 태초 시간이 느껴지는 것 같다. 그리고 집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분도 든다. 영화는 오래되고 낡은 아파트에서 그럼에도 애정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겨우 28 년 살았지만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어떤 이야기든지 ‘그럼에도’부터의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집의 시간들>은 그런 영화다. 장롱 깊숙한 곳에 들어갈 걸 잘 알면서도 애정으로 만든 가족 앨범 같은 것. 익숙한 얼굴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기꺼이 꺼내서 본다. 그리고 매번 처음 보는 것처럼 웃는다. 속절없이 추억에 지는 것이다.





가족이 모이는 풍경 <바닷마을 다이어리>
내게도 언니가 있다. 욕심 많고 심보가 고약한 나와 달리 속이 깊은 연년생 언니. 물론 둘 중 한 명이 다음 날 입고 갈 옷을 훔쳐 입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아직 발발하지 않은 제3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요약하자면 대개 이렇다. 네 자매가 사소한 사건으로 싸우고 화해한다. 조금 특별한 점이 있다면 막내 스즈가 15년 전에 집을 떠난 아버지의 딸, 그러니까 이복 여동생이라는 사연이랄까. 나머지 세 자매의 사연도 평범하지 않다. 앞서 말했듯 아버지는 오래전에 새로운 여자를 만나 집을 떠났고, 어머니마저 도망치듯 자식을 두고 떠났다. 그렇게 낡고 커다란 집에서 네 자매가 살게 된 것이다.
다행히 네 자매는 비뚤어지지 않고 각자의 개성을 지니며 잘 성장했다. 어른스럽고 똑 부러지는 첫째 사치,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언니와 자주 싸우지만 그 언니가 슬프면 가장 먼저 위로해주는 둘째 요시노, 어리바리한 것 같으면서도 구성원의 중심을 잘 잡는 셋째 치카, 뒤늦게 집에 입성해 어른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넷째 스즈. 속옷 마를 날 없이 복작복작한 이 집에 네 번의 계절이 지나가면서 자매의 관계도 조금 더 친밀해진다.
사실 세 자매가 스즈를 만난 곳은 아버지의 장례식장이었다. 어린 나이지만 유난히 조숙한 스즈가 마음에 걸린 사치가 먼저 함께 살자고 제안했다. 아마 사치는 스즈에게 마지막으로 아이다울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을 것이다. 부모의 부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니까. 그렇기에 늘 침착한 그녀에게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원망은 있다. 어느 날 집을 처분하자는 엄마의 말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사치가 말한다. “뭘 안다고 그래요. 엄마는 이 집 문제를 거론할 자격이 없어요. 정원 관리도 한 번 해본 적 없으면서. 집 버리고 나간 사람이 뭘 알아요!” 어쩌면 사치는 이 오래된 집을 지키며 누군가 돌아오기를 바란 건 아니었을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집이라는 매개로 가족의 성장을 이야기한다.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주지만 결국 그 상처를 보듬어주는 것도 가족이라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늘 통속적이다. 사는 게 거기서 거기니까. 그렇다면 이왕 통속적이라면 우리는 평생 잘 싸우고 잘 화해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하지 않을까? 저기 바닷가 마을에 사는 네 자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