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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원하는 음식

The Food That Saves Me

나를 구원하는 음식

Editor.Hyein Lee / Illustrator.Subin Yang Article / opinion

지난해 교보문고에서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책을 보았다. 또 그저 그런 힐링책이 나왔군 하며 쓱 지나쳤는데, 가끔 그 제목이 또렷하게 생각났다. 베스트셀러가 된 책을 보니 그런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닌 듯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입안에 가득 찬 치즈, 뜨끈한 국물, 한 잔의 차, 아이스크림 두 덩이같이 별거 없는 음식이 우울의 속도를 늦춰줬다. 차차 속도가 줄어든 우울은 어느 순간에 멈췄다. 볼록 나온 배를 두드린 후였다.




“나를 지지해주는 기분”

홍화정(27세 / 일러스트레이터)
사는 곳: 경북 포항시 남구 오천읍
거주 형태: 가족과 생활

프리랜서가 되고 나서 마감을 기점으로 상태가 좋거나 나쁘거나 한다. 마감일이 코앞에 다가왔는데 작업이 영 풀리지 않을 때면 뒤통수가 저리고 머리 위에 바위가 쿵 내려앉은 기분이 든다. 더 이상 발전이 없는 낡은 작업물을 만들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겁을 먹는다. 그저께는 작업하다가 벌떡 일어나서 가지올리브절임에 와인을 마셨다. 이대로 앉아 있어봤자 진전되지 않을 것 같았다. 가지올리브절임은 맛도 훌륭하지만 내게는 만드는 시간이 더 귀중하다. 아무 생각 없이 가지를 씻고, 소금에 절이고, 레몬과 함께 데친다. 병에 올리브유를 깔고 데친 가지, 마늘, 페페론치노를 올리고 다시 올리브유를 깔고···. 재료가 차곡차곡 쌓일 때마다 뭔가를 해내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 눈에 바로 보인다는 것이 내심 안심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때 열심히 만들어둔 절임을 조금씩 꺼내 먹다 보면 그때의 내가 나를 지지해주는 기분이 든다.


“이곳에서만큼은 편히 아플 수 있다”

김은영(30세 / 디지털 마케터)
사는 곳: 서울시 은평구 불광동
거주 형태: 고양이와 생활

오전 시간에 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동료들에게 몸이 좋지 않다 하고 죽집으로 간다. 내가 자주 가는 곳에선 클래식 라디오를 틀어준다. 기침하는 사람, 약봉지를 뜯는 사람 틈에 앉아 얌전히 죽을 기다리면 나도 아픈 사람으로 인정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좀 나아진다. 회사에선 마음이 아픈 것을 내비치면 안 되니까. 나는 함부로 급하게 먹을 수 없는 죽이 좋다. 다 먹고 나서도 묵직한 기운이 없어서 좋다. 이곳에서만큼은 나는 편히 아플 수 있다.


“어쩌면 배보다 마음이 허한지도 ”

이민지(27세 / 직장인)
사는 곳: 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거주 형태: 혼자 생활

나의 우울은 마치 불꽃과 같다. 사소한 바람에도 금방 일고 또 금방 사라진다.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우울할 땐 차근차근 요리를 한다. 요즘엔 마라탕에 빠졌다. 매운 걸 잘 못 먹지만 이상하게 그 얼얼한 감각이 계속 생각난다. 마라 소스를 한 병 사서 알뜰하게 해 먹고 있다. 냉장고 속에서 시들어가는 채소를 몽땅 처리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마라탕을 먹을 땐 머릿속도 새하얘진다. 분명 우울한 마음에 찾아 먹은 음식인데, “습습 하하” 땀을 흘리며 먹다 보면 그새 잊고 만다. 그러나 우울은 배가 찬 뒤에 다시 찾아온다. 그 감정을 음식으로밖에 해결 못 하는 스스로가 한심하다. 어쩌면 나는 배보다 마음이 허한지도 모르겠다.


“단것을 찾게 된다”

전혜지(29세 / 백화점 판매원)

사는 곳: 경기도 수원시 신풍동
거주 형태: 언니와 생활

나의 유일한 낙은 매운 음식을 먹고 후식으로 마카롱을 먹는 것이다. 최근에 산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커피를 내려 마시기도 한다. 밥상을 밀어놓고 편한 자세로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마카롱을 먹고 있으면 언니가 한 소리 한다. “너, 그러다 살찐다!” 나는 마음속으로 ‘자기가 더 살쪘으면서’라고 생각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진 않는다. 사실 살이 찌긴 했다. 요즘 부쩍 진상 손님이 많아지면서 단것을 찾게 됐다. 하지만 그걸 끊으려면 직장부터 끊어야 할 것 같다. 아직은 한 팩에 5개 들어 있는 뚱카롱으로 버티고 있는 중이다.


“헤어진 여자 친구와 함께 먹었던 파네”

심민재(23세 / 대학생)

사는 곳: 서울시 강서구 화곡동
거주 형태: 혼자 생활

고향이 대구인지라 서울이 낯설게 느껴졌는데 여자 친구 덕분에 적응할 수 있었다. 아닌 것처럼 굴었지만 서울의 궁이나 유명 맛집에 가면 외국인처럼 신기해하는 것을 여자 친구는 다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도 연남동 어느 식당에서 파네 pane라는 음식을 처음 먹고 맛있다고 느꼈는데, 어느 날 집에서 요리해주었다. 직접 둥그런 빵의 속을 팠는지 바닥이 뜯겨나가서 파스타 소스가 새어 나왔다. 그래도 맛있었다. 진짜 맛있었는데 지금은 파네는커녕 크림파스타도 못 먹고 있다. 동거 4개월 만에 헤어졌기 때문이다. 친구와 레스토랑에 가자니 소름이 돋고 혼자 가려니 뻘쭘하다. 그래서 며칠 전에 쿠팡에서 크림소스를 하나 시켰다. 그런데 1인분에 얼마만큼 들어가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맥주의 쌉쌀함과 쥐포의 조화”

문주희(29세 / 편지 가게 ‘글월’ 운영자)

사는 곳: 서울시 종로구 행촌동
거주 형태: 남편과 생활

한 달에 한 번 오는 그날, 나는 깊은 우울감에 빠진다. 그 기분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처방전은 약도, 비위를 맞추는 남편도 아니다. 내게는 편의점 캔맥주와 쥐포가 필요하다. 사실 이 조합은 어느 때나 훌륭하지만, 생리로 인한 우울감에는 더욱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퇴근길 편의점에 들러 1만 원이 채 안 되는 비용으로 맥주 한 캔과 쥐포 한 봉지를 산다. 가방에 쑥 욱여넣고 쓸쓸한 기분을 느끼면서 집으로 돌아와 아무렇게나 신발을 벗고 가방을 턱 내려놓을 때 그제야 긴장이 풀린다. 부엌에서 긴 유리잔을 챙겨 테이블 위에 두고, 맥주 거품이 흐르지 않게 따른 후 잠시 기다린다. 그러곤 쥐포를 한 입 베어 물고는 그 짭짤함을 못 참겠다 싶을 때 맥주를 들이켠다! 청량감에 타는 목을 부여잡고 인상을 찌푸리면 그날의 우울이 묘하게 가신다. 슬며시 취기가 돌고 남은 맥주와 쥐포를 다 먹고 나면 더 마시지도 더 먹지도 않고 전보다 산뜻한(?) 기분으로 씻고 잠든다. 적어도 나에게는 맥주의 쌉쌀함과 쥐포의 짭짤함 그 ‘쌉짠’의 조화가 어느 당도 높은 초콜릿보다 탁월한 효과를 내는 것 같다.


“나를 살리는 커피”

김진욱(34세 / 방송 작가)
사는 곳: 서울시 마포구 창전동 
거주 형태: 혼자 생활

방송국에 살다시피 하니 어느 순간 몸이 망가졌다는 걸 느꼈다. 즐겁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달려왔는데 건강에 이상 신호가 오니까 이렇게까지 일을 하는 게 맞나 싶기도 하고, 이러다 비명횡사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걱정도 잠시일 뿐, 들이닥치는 회의와 수정 요청으로 일을 처리하느라 바쁘다. 그때마다 유일하게 나를 구원해주는 건 커피. 나를 살리는 동시에 건강을 해치는 음료지만 이제 그것 없이 일상을 유지할 수 없다. 아메리카노, 라테, 인스턴트커피 등 갖가지 커피로 나의 뇌를 각성시킨다. 카페인 중독이 된 건지, 어쩌다 생긴 휴일에도 커피를 찾는다. 가끔 죽으면 뼛가루가 아닌 커피 가루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진지하게 한다. 


“가장 편안하고 맛있는 집밥”

정재학(28세 / 회사원)

사는 곳: 서울시 관악구 낙성대동
거주 형태: 혼자 생활

처음 서울에 온 후 한 달가량은 너무 외로웠다. 대학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느낀 서울은 차가운 회색 도시. 이렇게 북적이는 와중에도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는 걸 난생처음 깨달았다. 고향에선 심심하거나 우울할 때 자전거를 타고 바닷가로 가서 노래를 부르거나 기타 연주를 하곤 했는데, 서울엔 한강이 있지만 무엇을 해도 고향과 같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가장 편안하고 맛있는 집밥, 그중에서도 일요일마다 부모님과 함께 아침 시장에서 사 온 회가 떠올랐다. 시장을 돌아다니며 싱싱한 횟감을 찾아 먹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는데, 배고픔이 극대화되어 더 맛있게 느낀 것 같다. 내 인생에 가장 주말다웠던 주말이 요즘 많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