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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 감옥의 시대

The Age of Taste Prison

취향 감옥의 시대

Writer. Jiwoo Jung / Illustrator.Subin Yang Article / essay


집단적 존재에서 취향적 존재로


요즘에는 친구들끼리 만나더라도 각자의 취향을 들어주기 바쁘다. 누군가는 펭수에 대해, 누군가는 양준일에 대해, 누군가는 레트로나 독립 출판물에 대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말한다. 예전 같으면 남들이 좋아하는 걸 나도 좋아해야 하나 싶고, 서로 같은 걸 좋아하지 않으면 어쩐지 친구 같지 않고, 함께 좋아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권유하고 나누며 누리는 것이 마땅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각자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대로’ 내버려두며 들어주는 게 친구의 역할이 되었다. 그런 취향은 어지간해서는 ‘개취존중, 즉 개인 취향 존중으로 받아들여진다.


취향이 다양해지고, 조금 더 자신에게 어울리는 게 무엇인지 알아가고, 당연시되고, 존중받는 시대란 아무래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아마도 우리 사회는 너무 오랫동안 집단적인 것에 길들여졌을 것이다. 나 어릴 때만 해도 인생과 일상에는 대개 정답이 정해져 있었다. 언제쯤 결혼하는 게 좋은지, 어떤 직업을 갖는 게 마땅한지, 아이는 몇 낳는 게 좋고, 무엇을 먹는 게 건강하거나 한국인다운 것인지 정해져 있었다. 또한 명절에는 당연히 고향에 찾아가야 하고(시댁부터 먼저), 모두가 <전국노래자랑>이나 <가족오락관>을 보고, 일요일 아침은 디즈니 만화로 시작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삶의 방식은 집단화해 있었고, 그로부터 벗어나면 별난 것, 잘못된 것, 온전하지 못한 것으로 취급받곤 했다.



그런 시대에는 우리의 존재도 일종의 집단적인 것이었다. 기성세대가 양 진영으로 갈라진 정치적 입장을 콕 찍어 신념이라 여기는 이유는, 그런 입장이 곧 자기 자신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년 세대, 혹은 밀레니얼들은 좀처럼 진보나 보수의 개념을 확고한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나 자신이나 상대방이 어느 지방 출신인지, 본가가 어디인지, 어느 대학 출신인지도 예전만큼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역시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나와 같은 것에 대한 덕질에 빠져 있는가, 나와 비슷한 문화를 향유하는가, 혹은 나와 유사한 라이프스타일을 선망하거나 누리고 있는가가 아무래도 훨씬 중요해졌다. 나처럼 당신도 냥덕인가? 아니면 넬 덕후인가? 혹은 매일 펭수 영상을 찾아보고, 밤에는 <아무튼> 시리즈 책을 하나씩 읽는 게 인생의 행복인가? 그렇다면 당신이 경상도나 전라도 출신이면 어떠하고, 설령 나랑 나이가 몇 살 차이 나거나, 보수나 진보, 혹은 기독교인이나 불교인이면 어떠한가? 그런 집단적 정체성은 취향을 이길 수 없다.




길들여진 필터 속 세상


취향은 개개인의 중심이 되었는데, 그에 더해 취향이 같은 누군가를 만나는 일, 혹은 나의 취향을 누리는 일도 무척 손쉬워졌다. 과거였다면, 아프리카 초원 덕후는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신비한 동물 탐험> 같은 프로를 기다리는 것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아프리카 초원 덕후는 종일 전 세계의 관련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고, 그런 동물에 관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끝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며, 자기가 좋아하는 동물들에 대한 각종 정보를 인터넷으로 수집해 직접 길러볼 수도 있다.

그는 더 이상 <가족오락관>이나 <순풍 산부인과>를 보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되고, 자신이 좋아하는 동물 영상이나 질릴 때까지 볼 수 있게 되었다. 더군다나 넷플릭스나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각종 서비스와 플랫폼은 그의 취향에 맞는 것을 찾아서 가장 먼저 띄워주어 그의 수고를 덜어주며, 나아가 그가 자기만의 세계에 더 깊이 빠져들 수 있는 길을 적극적으로 열어준다. 이른바 ‘콘텐츠 큐레이션’을 통해서 말이다.



어떤 이에겐 그것이 천국의 도래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오타쿠라고 놀림받고, 혼자 세계를 여행하며 살고 싶어 하는 비혼주의자라는 이유로 모자란 인생을 사는 것이라 취급받거나, 독특한 취향 때문에 그와 관련한 것들에 접근조차 하기 어려웠던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취향의 시대’란 역시 더 ‘옳게 된’ 시대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러한 시대의 부작용도 야기되기 시작했다. 긍정적인 점이야 이루 말할 수 없겠으나, 계속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만 끊임없이 공급받으며 그 속에 갇혀 지내는 것에 부정적인 점은 없겠느냐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로는 ‘필터 버블’ 현상이 있다. 흔히 각종 서비스업체에서 내 취향에 따른 콘텐츠나 뉴스, 정보만 제공하는 것을 ‘필터링’이라고 한다. 취향이라는 필터에 정보를 걸러서 내가 원하는 것만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고른 영화를 토대로 그와 비슷한 영화만을 소개하고, 내가 산 제품을 토대로 내게 필요할 것 같은 물품을 광고로 띄우며, 내가 본 뉴스를 토대로 내가 좋아할 것 같은 이슈만 제공하는 것이다. 당장 유튜브만 켜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영상을 반드시 보여주고야 말겠다는 듯 끝없이 관련 영상을 펼쳐준다. 실제로 그중에는 내가 좋아할 만한 영상이 하나쯤은 있다. 그렇게 취향은 연결되고, 북돋워지고, 강화된다.  




‘싫어요’가 낄 수 없는 세계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애초에 나의 취향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온 걸까? 지금 나를 이루고 있는 내 취향의 모든 것이 내 DNA에 새겨진 것들이어서, 내가 오직 그것들만 좋아하는 운명으로 태어났을 리는 없다. 물론, 어느 정도 타고난 성향의 영향도 있겠지만, 내 취향은 대부분 살아오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부모의 영향, 어린 시절 또래의 영향, 나도 모르게 자주 본 프로그램이나 내가 속한 문화권에서 더 좋고, 인정받고, 칭찬받는 것들이 내 삶 속에서 인연을 맺으면서 교묘하게 ‘나의 취향’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생겨난 다음에는 자연스레 그것만 더 찾게 되고, 온 세상의 서비스가 그것을 도와준다.



결국 어떻게 보면 나는 어느 순간 갖게 된 나의 취향만이 더욱 강화되는 세상에 놓인 것이고, 다른 취향을 접하고 만나고 빠져들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유튜브에서 내가 좋아하는 잔잔한 음악을 찾아서 듣기 시작하면 끊임없이 잔잔한 음악만이 관련 영상으로 뜬다. 그러면 나는 뉴 에이지라든지 고요한 노래를 부르는 인디 밴드라든지 그와 유사한 분위기의 옛 노래까지 섭렵하게 되지만, 힙합이나 록·재즈의 아름다움은 억지로 찾아보지 않는 한 알기 어렵다. 더군다나 기존의 취향이 있고, 그에 관한 정보만이 계속 주어지니 다른 것을 굳이 알아야 하나 싶기도 하다. 과거 같으면 라디오를 들으면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자연스레 접할 수 있었고, 명절에 특집 영화를 찾아보면서 다채로운 작품에 눈뜰 수도 있었고, <100분 토론>을 보면서 대립되는 다양한 견해를 들어볼 기회가 반강제로 주어졌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나는 나와 같은 것만을 끊임없이 누리고 소비하도록 프로그래밍되고 있기 때문이다.


필터 버블이란 그처럼 모든 것이 필터로 걸러지고, 필터를 관리하는 업체에 취향 혹은 정보 주도권이 넘어가버리기까지 한 이 시대의 문제를 지적하는 용어다. 유튜브나 포털 뉴스는 나와 견해가 일치하고, 그래서 나에게 만족을 주고, 나의 기존 사고만을 끊임없이 강화할 수 있는 뉴스만을 중독적으로 제공한다. 내가 싫어하는 것이 노출되지 않으니 소비자나 시청자는 더욱 그런 뉴스를 찾게 되고, 더 많이 해당 사이트에서 클릭하며, 그렇게 모인 취향으로 정보 제공자는 크고 작은 권력을 얻게 된다. 오로지 ‘내 시청자’의 입맛에 맞는 뉴스와 견해만 끊임없이 제공하는 유튜버는 그렇기에 성공할 수밖에 없다. 더불어 시청자, 그러니까 이 시대의 소비자는 타인의 견해를 이해할 가능성이 더 줄어들게 되고, 나만이 옳다는 확신 속에 점점 더 빠져든다. 세상 전체에 객관적 공정함, 제삼자의 시선, 균형 잡힌 견해의 자리는 점점 사라지는 대신, 각자의 주관만 극도로 강화된 사람들만이 남는 것이다.


앞서 이 글을 ‘친구들’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생각해보면 요즘에는 친구들과 ‘더 나은 것’에 관해 말하는 게 점점 더 어렵다. 누구나 각자의 생각과 취향이 있고, 자기만의 방식이나 가치관을 존중하는 게 최우선이어서 그런지 애초에 더 옳은 것을 위한 토론이나 더 나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점점 더 불가능해지고 있지는 않나 싶다.



어느 정도 달라지거나 충돌하는 지점이 있으면 서둘러 선을 긋고 ‘개취존중’으로 넘어가버리는 것이다. 이는 분명 상대에 대한 존중의 의미가 강하지만, 한편으로는 회피의 의미도 있을 것이다



설령 더 낫거나 옳은 것이 있더라도 그에 관해 굳이 알고 싶지 않다, 당신이나 나나 다 똑같고 평등한 존재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등가적인 취향 속에 머무르고 있으며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 것만이 최선이다, 같은 태도만이 점점 더 확고해지는 것이다. 그런 문화 속에서는 한 개인이 지닐 수 있는 수정의 여지, 확장의 여지, 어쩌면 성장의 여지도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어쩌면 모든 시대는 그 나름의 특성으로 우리에게 이로움을 주지만, 그에 따른 그림자 또한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취향의 시대에서도 우리가 얻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잃거나 간과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한 깊이 고민해봐야 한다. 그러면 이 시대를 더 즐겁게 거닐 수 있을 것이다.





정지우

문화평론가,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