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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하고 느슨한 반복

Sincere and loose repetition

성실하고 느슨한 반복

Editor.Hyuna Lee / Photographer.Juyeon Lee Knock, Please

정혜윤 / 34세

프리랜스 마케터, 《퇴사는 여행》 저자


Conditions

지역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
구조 오피스텔
면적  46㎡(14평)
전세 1억8000만 원

Room History

정혜윤을 만나기 전 고민했다. 무엇부터 물어봐야 하지? 꽃을 꽂고, LP를 수집하고, 글을 쓰고, 요가를 하고, 춤을 추고, 칵테일을 배우고···. 직업은 차치하고 취미만 나열해도 질문지를 꽉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범위를 좁히기 힘든 사람이었다. 얼핏 모든 것이 되려는 것처럼 보이는 그는 사실 그 자신, 정혜윤이 되는 법을 익히는 중이다. 좋아하는 일을 반복하며, 성실하고 느슨하게.



스타트업에서 브랜드 마케터로 일하다 8월 초에 퇴사했죠? 우선 축하드립니다. 퇴사 후 일상은 어떻게 보내고 있나요?
사실 일은 벌써 시작했어요. 성수동에서 카페와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팀이 브랜딩을 의뢰해서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어요. 일주일에 2~3일 정도는 성수동에 가서 미팅도 하고, 인터뷰도 해요.


휴식 시간이 길진 않았겠어요.
네, 거의 없었어요.(웃음) 그래도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으니까, 여유를 벌면서 일하고 있다고 느껴요.


처음으로 독립하고 퇴사도 하고, 여러모로 변화가 많은 한 해네요. ‘2021년부터는 주 5일 출근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배경, 그 결심을 2020년으로 앞당긴 이유가 궁금해요.
일하는 방식이 정말 많이 변화하고 있다고 느껴요. 코로나19로 재택근무를 하면서 ‘다른 형태로 일하고 싶다’는 생각에 박차를 가한 거죠. 코로나19가 흐름을 더 앞당겼다고 생각해요. 또 2020년의 나는 2015년의 나보다 같은 시간을 들여도 훨씬 더 좋은 성과를 낼 자신이 있거든요. 그런데 물리적으로 너무 많은 시간이 한 곳에 묶여 있는 바람에, 다른 것을 해보고 싶은 욕구를 충족할 여유가 부족했던 거죠. 성과를 시간으로 측정하는 시스템에 의문이 생기기도 했고요.


요즘 ‘부캐’라는 개념이 주목받고 있어요. 마치 캐릭터를 선택하듯 새로운 자아를 만든다는 게 재미있더라고요. 좋아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사람에게 적합한 방식이겠죠. 혜윤 씨도 본격 부캐의 삶에 진입한 건가요?
저는 늘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괴로웠거든요. 하나에 만족할 만도 한데,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어서 고민인 거예요. 그런데 올 초에 《모든 것이 되는 법》이라는 책을 읽고 위로를 많이 받았어요. 저자가 5~6명을 모아놓은 것 같은 이력을 지닌 사람인데, 책 속에 ‘다능인’이라는 개념이 나와요. 요즘 저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이 많아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다능인 커뮤니티를 만들어보려고요!(웃음)


그러잖아도 본인을 ‘마케터’, ‘작가’, ‘여행가’로 분류하고 있었죠. 그런데 다능인이라니, 한마디로 정리가 되네요!
2017년에 홀로서기 실험을 해보고 싶어서 1년 정도 놀았어요. 아무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상태로요. 그때 ‘sideproject.co.kr’라는 도메인을 하나 사뒀거든요. 이것저것 다 하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다고 느꼈죠. 개인이 수익을 창출하는 매체가 되기도 하고, 플랫폼처럼 변하고 있으니까요.


직장인은 보통 주 단위로 시간을 감각하고, 생활하잖아요. 저는 프리랜서로 일할 때 시간 감각이 정말 둔해지더라고요. 혜윤 씨는 퇴사 후에도 여전히 ‘위클리’ 생활을 유지하고 있나요?
저는 큰 변화 없이 일주일 단위로 생활해요. 주중에는 프리랜서로 맡은 일을 중점적으로 하고, 휴일에는 제 개인 콘텐츠에 조금 더 집중해요. 노는 건 틈틈이 다 놀고.(웃음) 퇴사하고 나니 루틴이나 리추얼이 더 중요해지는 것 같아요.


여전히 주 1회 꽃을 사고요? 처음에는 ‘꽃’이 루틴이라니, 의아한 마음이 들었는데요, 생각해보니 이보다 로맨틱한 루틴도 없겠더라고요.
‘해야겠다’ 마음먹고 시작한 게 아니라,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꽃을 저렴하게 파는 상점이 생기면서 시작한 루틴이에요. 1만 원이면 꽤 다양한 꽃을 살 수 있거든요. 때로는 2주 가까이 생생한 식물도 있어요. 고를 때도, 집으로 들고 올 때도, 화병에 꽂을 때도, 볼 때도 좋으니까 계속하게 되더라고요. 내가 나를 기분 좋게 하는 일인 것 같아요.


이 루틴으로 인해 집에서의 시간이나 공간을 인식하는 마음에 변화가 생겼을 것 같아요.
이 집에 온 후로 청소를 자주 해요. 화병의 물을 갈아줘야 하니까, 겸사겸사 정리하는 거죠. 그러면서 저 자신도 돌보게 되는 것 같아요. 이 집을 구해서 이사 올 즈음 정말 우울했거든요. 장기 연애를 마친 후의 좀비랄까? 지금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에너지가 올라왔죠. 진짜 아무도 안 믿어요, 제가 힘들었다고 하면!


혜윤 씨가 브런치에 쓴 글에서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어요. “내가 쉽게 행복해지는 순간을 찾아 그 일을 계속한다. 그것만으로도 나 혼자와의 시간이 두세 배쯤 더 즐거워진다.” 그런데 단순히 혼자 있다고 해서 나와 친밀한 시간을 보내는 건 아니잖아요. 혜윤 씨는 어떨 때 진짜 ‘나 혼자와의 시간’이라고 느껴요?
2017년 혼자 여행을 떠났을 때 스스로 깨닫지 못했던 제 모습을 많이 알게 됐는데, 이 집을 가꾸면서 비슷한 경험을 했어요. 오래 만나던 사람이랑 헤어지다 보니까 자꾸 헷갈리고 혼란스러웠거든요. ‘이게 그 사람이 좋아했던 건가, 내가 좋아했던 건가?’ 정체성의 일부를 차지하던 ‘ᄋᄋᄋ의 여자 친구’가 사라지니까 저라는 사람이 반쪽이 된 것 같았어요. 그런데 이 공간을 채우며 ‘내가 좋아하는 건 이런 거였지’ 하면서 나라는 사람을 재확인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LP를 듣는 과정이 번거롭잖아요. 핸드폰에서 플레이 버튼을 누르는 일에 비하면 몇 배의 시간을 할애해야 하지만, 그 시간이 즐겁고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거죠. 그때 ‘내가 나랑 있는 시간을 즐기고 있구나’ 생각해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위클리 클래스도 많이 들으셨죠. 제가 발견한 것만 해도 칵테일, 아로마테라피, 그림, 도자기···.
워낙 호기심도 많고, 배우는 걸 좋아해서요. 이 공간도 제 작업실처럼 쓰고 싶었거든요. 뭔가를 배우는 일이 저를 업그레이드하는 것 같아서 좋아요.


그런데 스타트업은 정말 바쁘잖아요. 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요. 일하면서도 꾸준히 루틴을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뭐였나요?
하고 싶은 걸 하는 시간이 저에겐 ‘쉼’인 것 같아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음악만 들어도 좋지만, 평소에 치고 싶었던 피아노곡을 연습하는 것도 저에겐 휴식인 거죠. 또 칵테일이나 아로마테라피 같은 경우, 결과물을 내는 데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고요. 뭔가 만들고 나면 작은 뿌듯함이 있잖아요. 그런 지점에서 에너지를 채우는 거죠.


클래스를 듣는 건 관심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는 일이잖아요. ‘관심’을 ‘배움’으로 전환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은 뭐예요?
다른 세계를 알아가는 즐거움? 저는 뭔가 배울 때 그게 또 다른 세계라고 느껴요. 다른 나라가 있고, 도시가 있듯이 칵테일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대화가 있고, 역사가 있고, 취향이 있고, 스토리가 있는 거죠. 그런 걸 알아가는 게 재미있어요. 마케팅을 업으로 선택한 이유하고도 비슷해요. 이런 성향이 직업적으로도 알게 모르게 도움이 많이 됐던 것 같아요. 궁금한 게 있으면 빨리 배워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생각보다 인생이 길잖아요. 일 말고도 내가 나를 즐겁게 하는 일이 있으면 나중에 힘들 때 찾을 수 있는 게 더 많아져요. 선택지가 넓어지는 거죠.


선택지를 미리 심어둔다는 게 좋네요. 씨앗처럼요.
저는 정체성이 여러 개인 상황이 건강한 것 같아요. 건물에 비유하자면 나를 지탱하는 기둥이 여러 개인 거죠. 큰 기둥이 무너져도 다른 기둥이 있으니까 버틸 수 있는 거예요. 우리 엄마의 딸, 누군가의 여자 친구, 어떤 회사의 마케터라는 기둥도 있겠지만, 글쓰기 좋아하는 나, 그림 그리기 좋아하는 나라는 기둥을 세울 수도 있잖아요.


루틴이라고 하면 ‘매일 하는 것’, ‘뭔가 거창한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혜윤 씨를 보면서 매일매일 하는 것만이 이 단어의 성립 조건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 저도 그렇게 생각은 안 해봤는데··· 좋은 관점이다!(웃음)


직장인은 루틴에 대한 죄책감도 많이 느끼잖아요. 일상을 단단하게 만들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여기저기 치이다 보면 지키기 어려운 때도 많으니까요. 그럴 때면 ‘또 못 지켰어’ 하고 자신을 원망하기도 하고요.
맞아요. 제가 최근에 유튜브를 시작했거든요. 원래는 일주일에 한 편씩 올리려고 했는데, 지금 3주째 못 올렸어요.(웃음) 제가 친구한테 “일주일에 한 편은 불가능한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이걸 어떻게 하는 거냐”고 하소연을 했거든요. 그랬더니 친구가 일주일에 한 편씩 올리려 하지 말고, 그냥 계속하면 된다는 거예요. “너는 일을 하고 있고, 유튜브만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 다음에 올리면 또 한 거니까, 그게 꾸준한 거지.” 그 말이 위로가 됐어요. 어쨌든 멈추지 않으면 된다는 이야기였거든요. “그만하지 않으면 된다.” 리추얼도 그렇지 않을까요?


루틴을 만들어주는 앱 ‘Fabulous’을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아침, 점심, 저녁 루틴을 나눠서 설정할 수 있던데, 혜윤 씨 앱에는 어떤 루틴이 있나요?
저는 주로 아침에 집중되어 있어요. 우선 일어나서 물을 한 잔 마시는 것부터 시작해요. 제일 지키기 쉬운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아요. 물컵을 올려두고 일어나서 마시면 성공이거든요?(웃음) 그렇게 작게 시작해서 하나둘씩 추가했어요. 아침 먹고, 글 쓰고, 요가하고, 나에게 잘했다고 칭찬하는 것까지! 그게 습관이 되니까 일찍 일어나게 되고, 하루를 정돈하는 느낌이 있더라고요.


이 앱 말고도 습관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서비스가 있나요?
자아 성장 큐레이션 플랫폼 ‘밑미’가 론칭하기 전, 20명가량과 진행한 모닝 리추얼에 참여했어요. 일어나자마자 생각나는 글을 쓰고, 요가를 한 후 타임스탬프 앱으로 인증샷을 찍어 올리면 되는 거예요. 원래 요가는 일주일에 두 번 했는데, 밑미를 계기로 매일 5분이라도 하게 됐어요.


혜윤 씨랑 저는 어쩐지 반대되는 인간 같은데요. 저는 관심사가 많아지면 혼란스러워서 한두 가지만 남기고 포기하는 성격이에요. 좋게 말하자면 움베르트 에코가 말한 ‘완강한 무관심(stubborn incuriosity)’이라는 개념을 믿는 거죠. 그래서 혜윤 씨를 만나면 묻고 싶었어요. 그 많은 일과 취미를 핸들링하는 비법이 뭔가요?
무언가를 얻으려 하지 않는 것, 그 시간 자체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것, 실용성을 생각하지 않는 게 비법인 것 같아요. 그냥 뭔가를 하는 시간이 좋아서 하는 거거든요. ‘얼른 배워서, 만들어서, 팔아야지!’라는 마음으로 하는 게 아니고요.(웃음)


그런데 혜윤 씨가 좋아서 시작한 일들이 보통 결과물을 내지 않나요?
음,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나중에 연결되는 일은 있어요. 단순히 내가 좋아해서 해외 페스티벌을 다녔던 건데, 그걸 좋게 봐주셔서 취업을 하기도 했으니까요. 좋아하는 것을 많이 좋아하는 게 경쟁력인 시대인 것 같아요. 요새 퍼스널 브랜딩에 관심이 많잖아요. 저도 종종 관련된 질문을 받는 편인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매번 당황해요. 왜냐하면 의도를 갖고 한 게 아니니까요. 뭔가를 되게 열렬히 좋아해서 ‘아, 쟤는 BTS 좋아하는 애’, ‘고양이 좋아하는 애’ 이렇게 인식되는 게 작은 단계의 브랜딩인 것 같아요.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일이 많다고 들었어요. 《퇴사는 여행》이라는 책을 썼는데, 두 번째 퇴사는 여행이 아니라 무엇이 될까요?
음, 《독립은 여행》?(웃음) 관계에서의 독립, 가족과 함께 지내는 공간에서의 독립, 회사에서의 독립으로 나뉘더라고요. 지금 이 이야기를 하면 잘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Conditions

지역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
구조 오피스텔
면적  46㎡(14평)
전세 1억8000만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