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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리에서 새로 고침

Refresh in my spot

제자리에서 새로 고침

Writer. Eunjeong Song / Illustrator. Subin Yang Article / essay

어쩌다 책을 다섯 권이나 출간했다. 그 결과 우리 집 책장 맨 아래 칸에는 원고지 4000매 분량의 A4 용지가 고양이 털과 함께 차곡차곡 쌓여 있다. 다시 읽어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 초고가 영구히 박제된 채로. 저명한 작가의 글이었다면 엉망진창인 초고조차 귀한 대접을 받겠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처치 곤란 이면지 신세일 뿐이다.


원고는 대체로 집에서 썼다. 볕 한 줌 들지 않는 작은방의 옷장과 벽 사이의 책상에 앉아서, 때로는 김치찌개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부엌 식탁에서 일했다. 나는 그곳을 ‘집업실’이라 불렀다. 직장인이 회사로 출퇴근하듯 매일 아침 10시면 책상으로 향했다가 저녁 7시쯤 유유히 집업실을 빠져나오곤 했다.

그러나 글쓰기 시간이 확보되었다고 해서 작업량이 늘어나는 건 아니었다. 그 당시 나는 쓰는 것이 두렵고, 몰두하는 게 어려워 이리저리 피할 궁리만 했다. 심지어 제대로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다 꿈에서 맹비난을 듣기까지 했다. 평소 선망하던 베스트셀러 작가의 지적에 잔뜩 주눅 든 꿈이었는데, 한동안 장면이 잊히지 않아 그 작가의 책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스티븐 킹 Stephen King의 《유혹하는 글쓰기》부터 아니 에르노 Annie Ernaux의 《칼 같은 글쓰기》,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까지 온갖 작법서와 유명 작가의 에세이를 찾아 읽은 건. 당연하게도 하루아침에 글솜씨가 일취월장할 리 없었다.

다만 무언가를 계속해나가는 사람의 태도에 깃든 공통점, 한 줄기 희망이 될 작은 단서 하나를 발견했다. 직업인으로서 글을 쓴다는 건 영감이 오든 오지 않든 모니터 앞에서 닥치고 (매우 중요) 버텨야 한다는 것. “묵묵히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안에서 ‘뭔가’가 일어”난다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을 한번 믿어보고 싶었다. 재능이 특출나지도 않은 내가 그나마 흉내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므로. 요령 따위 없이 오직 그뿐이었다.


     

“하루는 어디까지나 하루씩입니다. 한꺼번에 몰아 이틀 사흘씩 해치울 수는 없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직업으로서의 소설가》

        

    


그렇게 4년 동안 규칙적으로 글을 쓰고 또 썼다. 피치 못할 약속이나 가족 행사, PMS 때문에 앉아 있기조차 괴로운 날을 제외하고는 일단 집업실로 출근했다. 마침내 내 이름을 단 다섯 번째 책이 나왔을 땐 “성실하게 글을 쓰고, 성실하게 미래를 도모하고” 심지어 “게으른 자신을 자책하는 것까지도 성실”한 작가라는 추천사의 영예를 누렸다. 하물며 내 첫 책의 저자 프로필에는 “열심히보다는 성실하게. 매일매일의 힘을 믿는다”라고 쓰여 있다. 마치 성실의 아이콘이 되기 위해 작정한 사람 같다. 덕분에 이제는 성실한 글쓰기의 비법을 질문받는 입장이 됐다. 그때마다 나는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난감해하다가 “직업이니까, 쓰는 게 제 일이니까요”라고 간신히 대꾸하고 만다. 속으로는 이런 구절을 떠올리면서.


“글은 그냥 쓰면 된다. 누가 읽어주건 말건, 누가 좋아하건 말건 그건 다음 문제다. 굳이 말하고 다닐 필요도 없다. 글은 의무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다. 그게 그렇게 힘들면 안 하면 그만이다. 글 쓴다고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아니다. 아니, 잘 먹고 잘 살기 정말 어렵다.” 
한수희,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그게 그렇게 힘들면 안 하면 그만”이라는 문장은 너무도 정확하게 아파서, 실은 내가 나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이기도 하다. 단 한 문장도 쓸 수 없어 자괴감에 빠질 때, 왜 써야만 하는지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을 때, ‘안 하면 그만’인 게 아니라는 억울함이 치밀 때마다 스스로 되묻곤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세상에는 매일 책상 앞에 앉아 글 쓰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며 추켜세워주는 사람들이 있다. 작가라는 직업은 질소로 가득 찬 과자 봉지처럼 지나치게 과대 포장된 게 아닐까. 오히려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꼬박꼬박 회사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에게서 존경심을 느낀다. 적어도 집업실에선 잠옷 바람으로 팔도비빔면을 먹으며 일할 수는 있으니까(물론 그럴 리 없다).

지옥철의 부대낌을 견디고,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을 인내하며 ‘존버’하는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하지만 내 안에는 저들을 시샘하는 마음 또한 선명하게 존재한다. 정확히는 존버의 대가가 부럽다. 차근차근 오르는 연봉과 직급 같은 구체적 보상을 볼 때면 다시금 직장인의 삶을 꿈꾸게 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언제나 제자리였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한 그 ‘뭔가’를 묵묵히 해나가는 과정은 너무도 더디고 지난해서 도무지 전진이라곤 없는 듯했다. 텅 빈 워드 화면을 마주할 때면 생전 처음 글을 쓰는 사람처럼 숨이 턱 막히고, 간신히 채워 넣은 문장을 지우고 쓰기를 반복한 결과가 기껏해야 원점이라는 사실에 화가 나곤 했다. 출판사와 약속한 원고지 700매 분량의 글을 완성하기 전까지, 그 글이 한 권의 책으로 묶이는 기적이 일어나기 전까지 보람은커녕 경제적 보상 또한 장담할 수 없다는 사실은 얼마나 절망적이었던지….


아무도 읽지 못할, 수신자가 없는 편지를 쓰면서 나는 자주 냉소에 빠졌다. 돈도 명예도 인기도 없는 전업 작가의 글쓰기란 자아실현의 도구에 불과하지 않을까. 누가 시켜서 쓴 것도 아닌데 서럽고 울화가 치밀었다. 그렇다고 별다른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출간 계약을 파기할 만큼 무모한 인간은 아니라서 나는 지푸라기 한 올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영화를 재생시키곤 했다. 일본의 어느 산골짜기 마을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여름이 절정에 달할 무렵, 짙은 녹음과 무르익은 벼가 화면을 가득 채우면 주인공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오늘도, 오늘도, 오늘도, 오늘도.” 흔들림 없는 나지막한 목소리. 이미 몇 번이고 본 영화임에도 나는 이 장면에서 매번 한결같이 울음이 터진다. 무성히 자란 잡초를 뽑고 또 뽑는 뒷모습과 흥건한 땀, 한껏 몸짓을 키운 농작물을 바라보는 표정에서 느껴지는 은근한 자부심과 기대. 영화 속 마을 주민들의 사계절을 지켜보며 나는 반복되는 오늘이 실은 끊임없는 ‘새로 고침’ 중이라는 사실을 확인받곤 했다. 같지만 같지 않은 순간들을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많이 놓쳐왔을까.


꾸준함이 어려운 건 변화가 눈에 쉽게 띄지 않기 때문이다. 당장의 성취 없이 의지를 밀어붙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내겐 글쓰기가 그랬다. 하지만 그런 덕분에 글을 쓰면서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의 사소한 차이를 감지하는 눈썰미가 생겼다. 고심 끝에 바꾼 단어 하나, 조사 하나로 말미암아 차츰 도약해나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고, 새로 고침의 순간마다 어제보다 조금 더 최선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누군가의 삶을 곤경에 처하거나 무참하게 만들 뻔한 실수 또한 면할 수 있게 됐다. 내가 믿는 매일매일의 힘은 그런 것이다.

        

새롭고 멋진 글을 하루도 빠짐없이 쓸 필요는 없다. “누가 읽어주건 말건, 누가 좋아하건 말건” 상관없이 내게 정직한 글을 쓸 수 있다면 좋겠다. 무엇보다 그냥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보다 더 대단한 일은 없을 것이다. 글 쓴다고 잘 먹고 잘 살게 될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송은정

매일매일의 힘에 기대어 《저는 이 정도가 좋아요》, 《오늘, 책방을 닫았습니다》 등 다섯 권의 산문집을 냈다. 씩씩하고 건강한 할머니가 되어 오래도록 쓰는 것이 목표다. 현재는 TWL의 에디터로 성실히 출퇴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