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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고’에서 뭘 배웠냐면요

What I Learned in Those Days

‘지옥고’에서 뭘 배웠냐면요

Editor.Hamin Kim / Illustrator.Subin Yang Article / opinion

어쩔 수 없이 살게 된 반지하, 옥탑방, 고시원. 하지만 그곳에서도 무언가 배우고 얻을 수 있다. ‘지옥고’를 거치며 깨달은 지난날의 교훈들.




“티끌에서 시작하는 거죠”

임정온(30세, 회사원)
사는 곳: 경기도 남양주시
구조: 분리형 투룸
집세 : 보증금 500만 원 / 월세 45만 원
살았던 곳1: 고시원 / 월세 35만 원 / 2년
살았던 곳2: 옥탑방 / 월세 35만 원 / 1년 6개월


고시원에서 옥탑방으로 옮겼으니 이젠 집이 주는 안정감을 누리며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옥탑방엔 또 다른 복병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죠. 개미 떼와의 눈물겨운 사투부터 시작해서 바퀴벌레 새끼 사냥, 겨울엔 이를 딱딱 부딪치며 해야 하는 샤워까지 정말 문제가 많은 집이었죠. 한동안 외출을 하면 집만 보였어요. 아파트 단지를 지날 땐 저런 집에 살 수 있을까, 다들 어떻게 사는 걸까, 저축했을까, 물려받았을까. 빼곡한 집들이 제게는 다 아득히 멀어 보였고, 내 형편을 생각하면 서럽기만 했어요. 하지만 새로 이사한 지금 사는 집엔 개미 떼 습격도 없고, 덜덜 떨며 씻지 않아도 되니 조금 나아진 건 분명해요. 티끌 모아 티끌이라도 어쩌겠어요. 가진 게 티끌뿐이라면 티끌이라도 모아봐야죠!


“집은 잠만 자는 곳이라고요?”

손재민(30세, 회사원)
사는 곳: 경기도 화성시
구조: 아파트 / 25평
전세: 2억5000만 원
살았던 곳: 고시원 / 월세 30만 원 / 1년


대학 시절, 서울에서 인턴으로 첫 직장 생활을 했어요. 사람들이 ‘지옥철’에 대한 겁을 하도 줘서, 걸어서 출퇴근이 가능한 뱅뱅사거리 근처에 있는 고시원을 구했죠. 방음이 전혀 되지 않은 고시원 생활은 마치 옆방 사람들과 동거하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해요. 옆방 아저씨의 숨소리조차 느낄 정도니까요. 가장 힘들었던 건 퇴근하고도 집에 누워 편히 통화조차 할 수 없다는 거였어요. 고된 하루를 보낸 날이면 가족이나 친구들과 통화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는데, 고시원에서는 침묵을 유지해야 했죠. 장난 반 진담 반 제 목소리를 잃어버릴 것만 같았어요.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24시간 운영하는 카페에 앉아 밤늦게까지 전화 통화를 하기도 했고요. 그때 깨달은 게 하나 있어요. 집은 잠자는 곳 이상의 공간이라는 사실을요. 남의 눈치 보지 않고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집이어야 한다는 걸 배운 거예요.


“결코 부끄럽지 않아요”

안병근(28세, 레스토랑 매니저)
사는 곳: 서울시 중랑구 상봉동
구조: 분리형 투룸 / 11평
집세 : 보증금 1000만 원 / 월세 35만 원
살았던 곳: 반지하 / 보증금 500만 원, 월세 30만 원 / 2년 6개월

마산 토박이로 살다가 음악을 하고 싶다는 꿈이 생겨서 서울에 올라온 때 이야기예요. 패기가 넘쳐서 뭐든 열심히 하면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죠. 반지하 하나를 임대해 연습실과 집을 겸용으로 사용하며 지냈어요. 하루에 5시간만 자고 음악 공부를 하는 데 매진했고, 남는 시간엔 아르바이트해서 생활비를 충당했어요. 식비도 최대한 아껴서 필요한 음악 장비를 사곤 했죠. 그렇게 음악이라는 꿈을 위해 2년 반 동안 반지하에서 전전했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업종인 식당에서 일하고 있어요. 누군가는 과거의 고생이 쓸모없는 시간 낭비라고 생각할 거예요. 꿈을 포기한 비겁한 결정이라고 여길지도 모르죠. 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곳에서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배웠거든요. 일단 최선을 다하면 결과가 어떻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다는 걸 이젠 알아요.


“우선순위를 배웠어요”

이지수(25세, 디자이너)
사는 곳: 대구시 동구 신서동 
구조: 셰어하우스 / 40평
집세: 월세 30만 원
살았던 곳: 고시원 / 월세 47만 원 / 2개월

고시원에서 산 건 취업에 대한 조급함 때문이었어요. 졸업 학기 중 갑자기 판교의 한 인테리어 스튜디오 그래픽디자인 팀 인턴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그땐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생각에 너무 설렜어요. 하지만 2주 만에 어떻게 집을 구하겠어요. 결국 새우잠으로 쪼그려 자야 하는 고시원에 살 수밖에 없었죠. 취업만 할 수 있다면 이 잠깐의 고생은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2평 남짓한 공간에서 살다 보니 점점 무기력증이 생기더라고요.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좁디좁은 공간에 살겠다고 했는지 회의감도 들었고요. 패배감 섞인 생각을 자주 하니 몸도 자연스레 게을러졌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어요. 지금은 세 끼니 밥과 반찬을 제공하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셰어하우스에 살고 있어요. 자아실현을 위해 하는 일만큼 건강한 몸과 생각, 환경도 중요하다는 걸 고시원 생활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에요.


“나를 지키는 힘”

백혜리(37세, 마케터)

사는 곳: 서울시 강남구 대치동
구조: 다가구주택 스리룸 / 35평
집세: 보증금 2억 원 / 월세 60만 원
살았던 곳: 반지하 / 보증금 100만 원, 월세 45만 원 / 10개월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침수된 반지하가 바로 제가 살던 곳 이야기예요. 비가 물 폭탄처럼 쏟아지는 어느 추석이었어요. 본가에 다녀와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었는데, 순간 무릎까지 물이 덮치는 걸 보고 엄청 충격을 받았어요. 그냥 빗물이 아니라 하수구 악취가 나는 구정물로 집이 난리가 난 거에요. 집주인 아주머니한테 사태를 말했더니, 며칠 있다가 찾아오겠다 하더라고요. 전 그 집에서 단 하루도 지낼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말이죠. 더 화가 나는 건 침수 피해 대상자에게 주는 지원금을 집주인이 받은 거예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 돈 필요 없으니 계약 파기해달라고 했어요. 집주인은 말려서 살면 될 걸 왜 이리 호들갑이냐며 되레 반문하더라고요. 이 사건이 있기 전까지 전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냥 주어진 일 열심히 하며 사면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런 답답한 일들을 마주칠 때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어요. 만약의 사태에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했죠.


“함께여서 가능했어요”

김혜스(28세, NGO 회사원)

사는 곳: 서울시 관악구 청룡동
구조: 오픈형 원룸 / 4평
집세: 전세 4500만 원
살았던 곳: 옥탑방 / 보증금 500만 원, 월세 40만 원 / 4개월

한겨울 5층 옥탑방에서 친구와 둘이 산 적이 있어요. 옥탑방이라 그런 건지 그해 겨울이 유독 추웠어요. 화장실에서 샤워하는 건 정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하는 일이었어요. 화장실에 있는 시간을 줄이려고 머리가 긴데도 싱크대에서 감기도 했고요. 한번은 한파 경보가 내린 날이었는데, 갑자기 보일러가 고장 난 거예요. 어쩔 수 없이 당장 필요한 짐만 챙겨서 친구 집으로 가서 신세진 적도 있죠. 옥탑방 생활을 하면서 느낀 건 ‘사는 게 쉽지 않지만, 그래도 살길은 있다’ 였어요. 친구와 같이 지낸 덕분이에요. 친구와 일심동체가 되어 가구도 들이고, 전구도 달았지요. 가끔 침대에 같이 누워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었고요.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게 굉장한 힘이 된다는 걸 배운 시간이에요.


“미안한 거짓말”

유현(30세, 디자이너)

사는 곳: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구조: 분리형 원룸 / 8평
집세: 전세 1억6000만 원
살았던 곳: 고시원 / 월세 43만 원 / 6개월

대학 시절 지내던 자취방 보증금과 통잔 잔고를 합쳐보니 100만 원이었어요. 교통비도 아낄 겸 회사 옆 고시원을 얻었죠. 당시 부모님께 광각렌즈로 한껏 부풀린 광고 사진을 보내놓고 서울에 원룸을 얻었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부모님은 서울 집값을 가늠조차 못 하셨기에 자식이 고시원에서 산다고 말하면 속상해하실 것 같았거든요. 고시원에서 3개월 정도 살고 있을 즈음, 어느 날 부모님한테 전화가 왔어요. 자식이 서울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셨는지, 하룻밤 묵고 가도 되냐고 하셨죠. 둘러댈 핑곗거리를 찾다가 결국 원룸이 아닌 고시원에 산다고 이실직고했어요. 그때 느꼈을 부모님 심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안타까운 마음뿐이에요. 애초에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후회도 하고요. 이후 두 번의 이사를 거쳐 지금은 전셋집에 살고 있어요. 여전히 좁긴 하지만 이젠 부모님이 하룻밤 정도는 묵고 가실 정도는 돼요. 부모님께 더 이상 미안해하지 말라고, 키워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당연히 주어지는 게 아니더라고요”

이승구(26세, 대학원생)

사는 곳: 대전시 유성구 궁동
구조: 2인실 기숙사 / 10평
집세: 월세 25만 원
살았던 곳: 반지하 / 월 45만 원 / 1개월

지난겨울 집중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서울에 잠깐 지낸 적이 있어요. 보증금 없이 단기간 살 수 있는 곳을 알아보려고 원룸 앞에 적힌 집주인 번호로 스무 군데 전화를 했어요. 끈질긴 사투 끝에 계약하게 된 집이 빛이 많이 들지 않는 반지하였어요. 다행히 창문이 방과 화장실에 각각 있었지만 창문으로서 기능을 다하진 못했죠. 당시 겨울이라 눈이 종종 내렸는데, 눈이 녹아 떨어지는 소리가 그렇게나 싫었어요. 소리를 안 들으려고 창문을 닫으면 한순간에 집이 암흑으로 변하곤 했죠. 낮에도 밤처럼 살던 경험 덕분에 이전 집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들었어요. 공기청정기가 필요 없는 고향 집부터 마음껏 에어컨을 틀 수 있었던 기숙사, 아침 햇살에 잠을 깨던 첫 자취방까지. 익숙해서 당연하게 여긴 환경이 실은 감사해야 하는 환경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거죠.


“쓸모 있는 어른”

신동빈 (30세, 정신 건강 임상심리사)

사는 곳: 서울시 강동구 길동
구조: 원룸 / 5평
집세: 보증금 500만 원 / 월세 40만 원
살았던 곳: 옥탑방 / 보증금 500만 원, 월세 40만 원 / 5년

군 복무 시절, 전역을 앞두고 거주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대학가 월세가 워낙 높다 보니 가난한 대학생에겐 결국 반지하나 옥탑방밖에 남지 않더라고요. 답답한 반지하보다 그래도 주변이 트인 옥탑방이 낫겠다 싶었는데, 막상 살아보니 옥탑방 생활도 그리 녹록지 않더라고요. 비 오는 날이면 바닥으로 빗물이 새어 들어와 물난리를 겪기도 했고, 여름에는 햇빛을 직격으로 받아 불지옥이 되기도 했어요. 이런 열악한 상황을 극복하려고 여러 가지로 고군분투했지요. 새는 빗물을 막기 위해 방수제를 바르기도 했고, 열을 식히려고 옥상에 주기적으로 물을 뿌리기도 했어요. 겨울에는 추위를 막아보려고 에어캡이나 문풍지를 사서 벽과 창문에 붙이기도 했고요. 거창한 공사는 아니었지만 악조건 속에서도 스스로 뭔가 개선할 수 있다는 걸 경험했어요. 스스로가 조금 쓸모 있는 어른이 된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