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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가깝게 뉴노멀 채소 구독

More Closely, New Normal Vegetable Subscription

더 가깝게 뉴노멀 채소 구독

Editor.Jayeon Lee / Photographer.Juyeon Lee Article / reportage

‘구독’은 ‘살 구(購)’ 자에 ‘읽을 독(購)’을 합쳐 만든 단어로, 책이나 신문·잡지 등을 구입해서 읽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는 그 범위가 다양한 재화와 서비스로 확장된 시대에서, 나는 구독의 의미를 재해석해보기로 했다. 지금껏 눈에 보이지 않아 몰랐지만, 내가 좀 더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애쓰는 누군가의 수고(劬수고로울 구)를 읽는(購읽을 독) 것, 그게 오늘의 구독 서비스다. 양평에서 ‘종합재미농장’을 운영하는 김신범·안정화 부부는 다달이 구독자에게 채소 꾸러미를 보낸다. 제철 채소와 열매를 고르고 그것들을 소개하는 다정한 편지도 잊지 않는다. 말갛게 웃을 때 유난히 하얘 보이는 그들의 치아를 보면서 까맣고 빨갛게 익은 게 작물뿐만이 아니라는 생각에 나도 따라 웃었다. 뜨거운 뙤약볕을 버텨낸 수고를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어쩌면 가장 느린 구독 서비스

  

   


양평군 개군면의 한 주택에 도착했을 때 나를 반겨준 건 오디로 붉게 물든 마당이었다. 커다란 뽕나무 밑에 토실토실한 오디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다. 그 풍경을 보았을 때 비로소 내가 농장에 왔다는 걸 실감했다. 종합재미농장의 주인인 김신범·안정화 부부는 먼저 집 뒤편의 밭을 소개해주었다. 340평가량의 평지가 네모반듯한 형태로 조각조각 나뉘어 각각 다른 작물이 자라고 있었다. 처음 보는 경작 디자인에 정체를 물으니 다품종 소량 생산을 위한 구획이라고 했다.


“처음 양평에 온 게 본격적인 귀농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자급자족한 생활을 위해 온 거였어요. 그래서 밭에 오로지 우리가 먹고 싶은 채소나 식생활에 필요한 작물을 키워보려고 했죠. 그렇게 감자, 고구마, 파, 오이, 토마토 등을 심었더니 어느덧 30~50가지가 되더라고요.” 김신범의 말에 이어 안정화가 덧붙인다. “시골에 내려오기 전에 유럽으로 7개월 동안 농사 여행을 간 적이 있어요. 보통 본 적이 없는 건 상상하기 힘들잖아요. 그래서 자연농 사례를 직접 접해보고, 다른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보려고 떠났죠. 덴마크 친환경 공동체 스반홀름에도 가보고, 영국의 자급자족 친환경 농가에도 갔어요. 그런데 하루는 한 농장에서 일손을 돕는데, 양파밭에서 알감자가 자란 거예요. 그걸 본 농장 주인이 “여긴 양파밭이니까 이건 잡초야. 뽑자!” 하더라고요. 그 순간 어떤 것도 잡초가 아닌 농사를 짓고 싶었고, 그러려면 여러 가지가 함께 자라는 다품종 소량 생산을 해야겠더라고요.”




놀랍게도 종합재미농장에서 두 농부가 지켜주는 건 잡초가 될 위기의 작물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벌레와 미생물 그리고 뿌리를 갉아 먹어 심각한 문제를 만드는 두더지까지였다. 이 농장은 석유를 써야 하는 농기계와 각종 비닐류, 토양과 강물을 오염시키는 농약과 제초제를 일절 쓰지 않는다. 하늘과 땅에 맡기는 자연농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다. 물도 비가 내리길 기다리다가 풀들이 너무 시들시들하면 그때 조금 주는 정도다. 자연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니 일부러 시간도 오래 걸리고, 품도 배로 드는 길을 택했다. 한창 취재를 하다가 그때 깨달았다. 온갖 첨단 기술을 말하는 이번 호에서 이들 부부의 농작물이 가장 느린 서비스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아마도 본연의 모습에 가장 충실한 서비스이지 않을까.


곱절은 더 불편한 이 기술에 대해 김신범에게 물었을 때 농부로서의 강단이 느껴졌다. “작물을 갉아 먹는 벌레나 두더지를 그대로 내버려두는 건 사실 이들이 밭에 살아 있어야 저희가 기계를 안 쓰고도 농사를 지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벌레들 덕분에 토양이 더 비옥해지고, 두더지가 땅굴을 파면서 공기가 들어가거든요. 그게 원래 밭의 모습이에요.”







줄여야 비로소 가까워진다

  


다품종 소량 생산과 친환경 농사법이 구독 서비스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궁금해질 타이밍. 처음엔 그저 두 부부의 자급자족을 위해 꾸리던 밭이었는데 이게 웬걸, 자연은 생각보다 훨씬 너그러웠고 두 사람은 그 수확량을 감당하기 역부족이었다. 남는 생산물을 그대로 둘 수 없어 고민한 끝에 ‘종합재미꾸러미’가 탄생하게 됐다는 말씀. 1년 동안 제철 채소와 열매를 한 달에 한 번 사람들의 식탁으로 보내기로 한 것이다. 그때 나는 한 장의 종이를 건네받았다. 엑셀의 네모 칸을 병합하고 잘라내 밭 모습을 그대로 그린 도면이었다. 꾸러미 계획은 생각보다 치밀했다. 구름의 시선에서 밭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구획을 정확하게 정리한 것이다. 심지어 연초에는 이 종이를 놓고 어디에 무엇을 심을까, 회의하는 둘만의 연례행사를 진행하기도 한다고.


채소 꾸러미를 위해 먼저 SNS로 사람들의 신청을 받았다. ‘마르쉐@’에서 만난 이들과 가까운 이웃들 그리고 SNS를 본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비록 많은 사람에게 보낼 수 없는 분량이라 7~10명만 한정하고 있지만, 정확한 배송을 위해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일반 농산품은 생산자로부터 소비자에게 도달하기까지 최소 5단계를 거친다. 농민- 산지 수집장- 도매시장- 공급업체- 소비자 순이고, 한두 곳의 중간 상인이 개입하면 최대 7단계까지 늘어난다. 기존 시스템이라면 소량 생산 농부는 이 시장에 진입할 수조차 없다.


  

   

“도소매 유통망을 통과하려면 거기서 요구하는 단위를 맞춰야만 하는데, 저희는 규모가 워낙 작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에게 저희가 추구하는 농사법이나 채소 꾸러미를 직접 알릴 수 있게 되면서 좋은 기회가 생겼죠.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갖고 있는지 바로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지금의 택배 시스템이 없었다면 꾸러미도 사실상 어려웠을 거예요.” 농부와 소비자가 직접 마주할 기술이 생겼을 뿐인데, 그 변화는 조금씩 커져갔다. 대량생산 중심의 농장뿐만 아니라 소규모 농장도 거래를 할 기회가 마련되었고, 또 소비자는 농부로부터 먹거리 이야기를 상세히 들을 수 있게 됐다. 어떻게 자랐는지부터 어떻게 먹으면 가장 맛있는지까지 말이다.






지지와 응원을 지불하겠습니다

안정화는 꾸러미 구독자를 ‘꾸러미 식구’라고 부른다. 우리 모두가 같은 땅에서 나고 자란 같은 작물을 나누어 먹기 때문이다. 애칭이 따뜻해 곰곰이 곱씹다가 두 농부가 구독자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지를 떠올렸다. 소통과 거래가 기술을 통해 이어졌다면, 사람들의 하루 세끼는 땅을 통해 이어지는 것 같았다.

일면식 없는 이들과 연결감을 느끼는 것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일이지만 그 너머를 더 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왜 우리가 농부의 이야기를 꼭 들어야만 하고, 그들과의 거래가 우리 모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마르쉐@가 농부와 소비자의 관계를 형성하는 자리 역할을 한다면, 종합재미꾸러미는 그걸 좀 더 길게 연장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한 해 동안 꾸러미를 받아보고 다음 해에 다시 신청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이유만으로 더 많은 힘을 얻거든요. 무엇보다 저희는 주변 환경에 안 좋은 영향을 최소화하려는 방식으로 농사짓고 있잖아요. 그런데 이게 판매가 안 돼서, 우리가 먹고사는 게 힘들어진다면 이 방식을 계속 고수하기는 어렵겠죠.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누군가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방식으로 소비하는 게 일반적이잖아요.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저희에게 힘을 북돋아주는 건 맞아요.”


   

농부의 선택을 나의 선택으로 연결할 때 신념은 더 굳건해지고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 다양한 네트워킹 기술과 SNS로 사람들이 묶여 있는 동안, 이왕 사는 김에 더 좋은 소비를 하고 싶다는 밀레니얼 트렌드가 더해진 것이다. 종(種) 다양성이 풍요로운 생태계가 더 살기 좋은 환경이라고 했던가. 이렇게 소규모 농장이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라면, 우리의 농업 생태계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하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기술이라고 하면 나는 거기서 비롯한 간편함이 많은 것을 생략한다고 생각했다. 기술건너편에 있는 사람, 나의 선택권, 땅에 물든 농부의 손같은 것들. 거래 과정에 오로지 금액과 재화만 남기고 그 외의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도록 단정하게 치워둔것 같았다. 하지만 종합재미농장의 두 농부를 만난 후에는 비로소 기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을 돌아볼수 있었다. 이름 모를 사람들과의 연결, 더 나은 선택을위해 나를 대신한 누군가의 선별, 알 수 없던 농부의 이야기. 간접적대면이 직접적 이해관계를 완성하는 셈이니 놀랍다. 문득, 질문하나가 스친다. 우리가 진짜로 구독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한마디로정의하기 여전히 어렵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멀게만 느껴지던 농부와 직접 이야기하고 거래를 한 그접촉의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