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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의 속도로 살고 있습니다

Living in the Slowness

서촌의 속도로 살고 있습니다

Editor.Hyuna Lee / Photographer.Juyeon Lee Knock, Please

35세 / 박예지

‘문화도구’ 대표


Conditions

지역 서울시 종로구 옥인동
구조 다가구주택 투룸 지하층 
면적 43.2㎡ (13평)
보증금  1억4000만 원(전세)

Room History

29세 서울시 중구 만리동 원룸 오피스텔(보증금 1000만 원, 월세 60만 원)
31세 서울시 종로구 누상동 다세대주택(보증금 5000만 원, 월세 52만 원)
35세 서울시 종로구 옥인동 다가구주택 투룸(전세 1억4000만 원)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는 로스앤젤레스의 건물과 표지판이 시속 48.3km에서 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차가 큰 역할을 하는 도시이기에 빠르게 움직이는 중에도 볼 수 있도록 의도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경복궁의 서쪽에서는 어떨까? 이 동네에서는 뒷짐을 지고 골목 구석구석을 누빌 수 있는 느긋함이 필요하다. 옥인동에 사는 박예지는 동네와 자신에게 알맞은 속도를 배우고 있다. 오늘 안 되면 내일 하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다 보지 않아도 좋고, 어떤 건 놓쳐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이사한 지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았죠?
최근에는 이사 준비로 아주 바빴어요. 운영하던 상점에서 쓰던 물품도 있지만, 워낙 잡다한 물건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그걸 정리하는 게 아직도 숙제예요. 많이 버리고 있죠. 겉으로는 깨끗해 보이는데 구석구석 손볼 곳이 많아서 천천히 고쳐나가는 중이에요.

서촌에서 서촌으로 이사한 셈인데, 이 집은 어떻게 만난 건지 궁금해요.
서촌으로 이사 온 후에는 한 부동산에서 모두 집과 상가를 구했어요. 그 부동산 실장님이 서촌에서 태어난 토박이라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거든요. 하지만 저도 앱, 직거래 매물 등 다방면으로 알아보고 부동산에 가는 편이에요. 이 집은 입구가 따로 분리된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사실 내부보다 집으로 들어오는 독립된 통로와 작은 마당이 좋았던 거죠. 그런데 실제로 이사 와보니 대문도 부실하고, 전기 공사도 제대로 안 되어 있고, 옆집에서는 마당에 식물을 키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고···. 초기에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느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죠.

마당이 생긴 후 삶이 어떻게 변했나요?
벌써 많은 변화가 있는 것 같아요. 전에 살던 집도 마당이 있는 다세대빌라였지만, 편한 차림으로 있을 수 없었어요. 집 앞에 이웃이 앉아 있다거나, 친구분들과 부침개를 부쳐 드시는 일이 많았거든요.(웃음) 일단 이사 온 후로는 아침이 빨라졌어요. 잠이 안 오면 잠깐 나가서 앉아 있기도 하고요. 전에 살던 집은 남향이었고 이 집은 북서향에 반지하층인데 오히려 여기서 더 해를 많이 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일부러 나가게 되고, 문도 열어놓게 돼요. 몸과 정신이 빨리 깨어난다고 할까요. 고작 이런 작은 마당 하나 생겼다고 나름 바쁘기도 하고요. 잡초도 뽑아야 하고 비가 오면 물길도 만들어줘야 하고요.



서촌에서 두 번째 이사인데요, 만리동에 살다가 이곳으로 오게 된 계기가 있나요?
문화도구를 운영하기 전에는 백화점에서 매니저로 근무했어요. 서비스직에서 오래 종사한 거죠. 그때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는데, 병원에서 “박예지 씨 인생에 박예지 씨가 없다”라고 하더라고요. 그 후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찾으면서 동시에 새로운 공간을 찾게 됐어요. 그러다 우연히 서촌에 왔는데 느낌이 너무 좋더라고요. 마당이 없어도 비좁은 창문턱에서라도 다들 식물을 키우더라고요. 그 모습이 따뜻해 보였어요.

서촌은 궁 근처라 개발이 제한되어 있잖아요. 높은 건물이 없고, 새로 지은 건물보다 옛 건물이 많고요. 집을 구할 때 이런 점 때문에 힘들지는 않았나요?
처음 이사 올 때는 집을 스무 군데 정도 본 것 같아요. 옛 동네이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옛 한옥이 그대로 유지되는 곳은 많지 않아요. 골목을 돌아다니다 보면 사뭇 세련된 개량 한옥을 볼 수 있죠. 겉으로는 낡아도 내부 공사가 잘된 경우도 많고요. 다만 다세대주택이 밀집한 곳이라 오피스텔이나 아파트에 익숙한 사람은 처음에는 적응하기 힘들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층간 소음보다는 생활 소음이 심한 편이거든요. 앞집 반찬이 뭔지, 가정 화목도는 어떤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고 할까요. 저는 야행성인데 이웃들은 8시만 되면 불을 꺼서 처음엔 조심스럽고 불편하기도 했고요. 이런 얘기를 하면 친구들이 걱정하는데, 이제는 저도 적응을 해서 “사람 사는 소리인데, 뭐”라고 대답하게 되더라고요.

청년층이 많이 이사 오는 편이긴 하지만, 아직은 노년층이 많지요?
네, 이웃 중 대부분이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어르신들이에요. 성이 조금 특이하면 성만 대도 알 정도죠. 또 집을 소유한 분이 많은데요, 수리가 필요하다고 하면 대부분 전화해서 이웃을 부르세요. 현역에서는 은퇴했지만 알음알음 친구를 통해 일하시는 느낌이랄까요.(웃음) 그렇게 수리하러 오신 분이 너무 연세가 많아 부탁하기가 민망한 적도 있었어요. 주민 간의 네트워크가 공고한 편이라 처음 이사 오면 텃세가 심하다고 느끼는 분도 있을 거예요.

예지 씨 SNS에 올라오는 거의 모든 사진이 서촌에서 찍은 것이더라고요. 거의 서촌 홍보 대사라고 해도 좋을 정도인데, 동네가 그렇게 중요한 이유가 뭐예요?
워낙 활동 반경이 넓지 않고, 집에 있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에요. 한번 외출하려면 마음을 먹어야 하고요. 그런데 서촌에서는 걸어서 어디든지 갈 수 있잖아요. 광화문 교보문고에 갈 수도 있고 시네큐브에 영화를 보러 갈 수도 있죠. 여기서 시청, 명동, 남대문까지는 걸어 다녀요. 광화문에 갔다가 동네로 돌아올 때 괜히 북촌이나 삼청동 여기저기 들렀다 오기도 하고요. 걸을 수 있는 범위의 지역만 돌아다녀도 충분히 많은 것을 충족해요. 문화와 가까운 위치랄까요. 어떤 분은 서촌이 교통이 불편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걸어서 다니면 불편할 게 없는 동네죠. 걸어서 다니면 가장 좋은 동네이고, 그래야 볼 수 있는 것이 많아요.

맞아요. 서촌에서는 다양한 풍경을 만나는 재미가 있어요. 배화여대 내리막길의 기분 좋은 부산스러움, 통인시장이나 먹자골목의 와글와글함, 자하문로의 고요함···. 예지 씨가 동네에서 가장 좋아하는 산책길은 어디인가요?
관광객이 많다 보니 주민이 걷는 골목은 따로 있는 것 같아요. 큰 골목이 아니라 작은 골목으로 숨바꼭질하듯 다니죠. 어디로 가도 길이 연결되어 있거든요. 만약 서촌에서 길을 잘못 들어도 당황하지 말고 천천히 구경하면서 걸어가면 어디로든 나가게 되어 있어요.(웃음) 저는 특정한 길보다 서촌 골목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기분이 좋아져요. 옛날 인터폰, 외벽등, 모두 다른 색으로 칠한 대문, 작은 화단, 어설프게 만든 천막이나 이웃의 빨래 널어놓은 풍경을 보는 것도 즐겁고요.

낡고 오래된 서촌 풍경이 예지 씨를 편하게 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그건 성장 과정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영화나 책에서도 영감을 많이 받지만, 제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사람은 엄마거든요. 엄마가 이런 풍경을 좋아하세요. 손으로 만든 물건, 귀엽고 아기자기한 물건을 좋아해서 놀러 오실 때마다 들르는 상점 순회 코스도 있고, 제가 서촌에 사는 것도 좋아하시죠. 사실 어릴 때는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 열아홉 번이나 이사를 했어요. 반지하에서 엄마랑 물을 퍼낸 기억도 있고요. 하지만 엄마는 아무리 낡은 집도 항상 예쁘게 가꾸며 사셨어요. 잠깐을 살더라도 내 집처럼 편안하게 꾸며주셨죠. 그런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지금은 경기도에 사시는데, 부모님 집도 잡지에 나온 적이 있어요. ‘숲세권 베네치아 주택’ 이런 제목으로요.(웃음)



궁 근처에서 사는 건 어떤가요? 전 아직도 경복궁 야간 개장에 못 가봤는데, 아무래 궁 근처에 살면 자주 갈 것 같은데요?
야간 개장 예매가 치열해서 저도 얼마 전에 겨우 가봤어요. 하지만 낮에는 자주 가요. 일부러 가는 게 아니라 광화문이나 삼청동에 갈 때 괜히 궁을 거쳐서 가는 거예요. 굉장히 매력적인 산책로라고 생각해요. 저는 경복궁이 동네의 일부인 거잖아요.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처럼 일부러 찾아와야 하는 게 아니니까 늘 편안한 마음으로 다닐 수 있다는 점이 좋아요. 굳이 시간에 쫓겨서 다 보지 않아도 되고, 시간 자체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보고, 내일 또 오자는 마음으로.

예지 씨는 이 동네에서 5년 가까이 살고 있으니 동네가 변하는 모습을 느낄 것 같아요. 갑자기 뜨기 시작했고 아직 그 열기가 가라앉지 않은 곳이잖아요.
지금은 과도기라고 느껴요. 어느 날 서촌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새로운 상점이 생기기도 하고, 좋아하던 가게가 사라지기도 하고요. 이 시기가 지나가면 좋은 방향으로 새롭게 어우러지지 않을까요?

문화도구라는 소품 숍을 직접 운영했잖아요. 자영업자로서 서촌에서 지내는 마음은 생활자의 마음과 다르지 않을까요?
그렇죠. 2018년 초까지 운영하다가 지금은 정리하고 온라인 숍을 준비 중이에요. 아무래도 서촌 상권이 갑자기 유명해졌기에 터무니없이 비싼 월세를 부르는 경우가 많았어요. 지금도 그렇지만요. 가격 대비 규모와 시설이 말도 안 되는데도 선택을 하는 건 서촌의 고유한 분위기를 포기할 수 없어서라고 생각해요. 저도 이런 이유로 낡은 점포를 구해서 고생을 했던 거고요.(웃음)

하지만 인기 있는 동네의 상권이 매출을 보증하는 건 아니죠. 구매하기보다는 단순히 구경하러 오는 사람도 많고요. 이제는 없어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가게가 대단해 보여요.
그래서 저는 일부러 2층 상가를 구한 거예요. 구경하기보다 일부러 찾아오셨으면 해서요. 좁은 계단을 수고스럽게 올라오는 사람이 좋아할 만한, 방문할 이유가 충분한 공간을 만들고 싶기도 했고요. 또 우연히 지나가면서 들른 손님은 쉽게 실망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 게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죠. 요즘도 저는 단골 가게 사장님들이 매출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자주 봐요. 세가 너무 올라서 다른 지역으로 옮기거나 장사를 접는 경우도 많고요. 그래서 저는 계속 단골집을 잃고 있죠.

자영업자로서 얻은 교훈이 있다면요?
가게는 가게 자리에, 집은 집 자리에!(웃음) 원래 상가로 쓰지 않던 공간을 개조하는 경우에는 난관이 많아요. 제가 구한 상가도 가정집을 개조한 거라 벽을 헐고, 천장을 노출해야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의도치 않게 낡은 부분이 보이고, 수리는 끊이지 않고···.



인스타그램에 “서촌의 낡음이 참 좋고 귀여우면서도 집을 구하는 일이 어렵고 서럽다. 분수에 맞는 삶을 살며 더 나은 삶을 위한 꿈을 꾸며 살아야겠다”라고 썼어요. 예지 씨에게 분수에 맞는 삶은 어떤 것인가요?
제가 이제 30대 중반이잖아요. 전전긍긍하면서 ‘이때쯤에는 전셋집이라도, 얼마 정도의 저축이라도 있어야지’라고 생각하는 게 싫었고, 직업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주어진 제 형편에 알맞게 살고 싶었어요. 작은 집이면 어떻고, 낡은 집이면 어때요. 모든 조건을 부합하는 집을 찾기는 어렵잖아요. 분수에 맞는 삶을 산다는 건 자신에게 우선순위를 두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지금 분수에 맞는 집을 선택했다고 봐요. 전에는 투룸에 살았으니 이사할 땐 스리룸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집값이 올랐고 다른 지역으로 가는 건 싫으니, 독립된 마당이 있고 동물과 함께 살 수 있는 거로 만족하는 거죠. ‘좁은 집에 고양이가 많아서 힘들지만 대신 건조기를 쓰자!’ 뭐 이런 거?(웃음)

그러고 보니 4년 전 예지 씨를 처음 만났을 때랑 분위기가 좀 달라졌어요. 이사한 후 일어난 변화일까요?
많이 바뀌었죠. 직장 생활을 하던 때에는 먼 미래에 대한 걱정이 많았는데 요즘은 한 달, 한 주를 어떻게 잘 살지 생각하는 것 같아요. 나중을 위해서 지금을 아끼는 게 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부분에서 조금 여유로워진 것 같아요. 종종 화나는 일이 있거나 주인집 또는 옆집에서 말도 안 되는 간섭을 할 때도 있죠. 그러다가 동네를 돌아다니면 기분이 좋아지고 왠지 치유가 되는 것 같아요. 제가 살고 싶은 곳에서, 원하는 곳에서 사는 거잖아요. 이 동네에서 어디로 가면 제가 좋아하는 곳이 나오는지 다 알고 있고요. 하루하루 동네와 상호작용을 하며 지내는 것 같아요.



Conditions

지역 서울시 종로구 옥인동
구조 다가구주택 투룸 지하층 
면적 43.2㎡ (13평)
보증금  1억4000만 원(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