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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차를 다 마시고 봄날로 가자

Let’s Head out for Spring After This Tea

이 차를 다 마시고 봄날로 가자

Editor.Hyuna Lee / Photographer.Juyeon Lee Knock, Please

26세 / 양다솔

출판사 직원, 《간지럼 태우기》 저자


Conditions

지역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구조 다세대빌라 투룸
면적  43㎡(약 13평)
보증금 1억 7000만 원(중소기업 청년전세자금대출)

 

Room History

 

20세 경기도 부천시 역곡동 다세대빌라 투룸(보증금 5000만원, 월세 20만원)

 

 

어느 날 양다솔은 두 가지 모습을 양손에 들고 나를 찾아왔다. 하나는 “핫핫핫” 호쾌하게 웃으며 듣는 이를 정신 못 차리게 할 정도로 많은 말을 쏟아내는 친구의 친구였고, 다른 하나는《간지럼 태우기》라는 독립 출판물을 쓴 작가였다. 그는 책의 서문에서 “말은 기뻐야 힘이 나고 글은 슬퍼야 깊이가 있다”고 썼다. 그런 이유로 나는 언제나 후자의 양다솔이 더 궁금했다. 큰 눈과 큰 입 뒤로 어쩐지 아득한 구멍이 보였기 때문이다. 질문을 잘못 던졌다가는 발을 헛디뎌 빠질 수도 있겠구나 싶은 구멍이었다. 어떤 이야기가 쏟아질지 몰라서 약간은 두려운 마음으로 그의 집을 찾아갔다.
양다솔은 인터뷰하는 동안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인생에 얼마나 있겠느냐”라는 말을 다섯 번이나 했다. 그 문장은 비슷한 형태로 계속 변주되었다. 그러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고 말하기에는 그의 집이 너무나 정갈했다. 냉장고에는 저장 음식이 가득했고, 부엌에는 온갖 향신료가 구비되어 있었으며, 화장실은 물때 하나 없이 깨끗했다. 고양이들은 아무 걱정 없는 얼굴로 뜨끈한 바닥을 굴러다녔다. 오히려 “이 사람 참 잘 먹고 잘 사네”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양다솔은 찻상 앞에 앉아 보이차를 내렸다. 그는 자신 앞에 놓인 인생이 얼마나 이상한 모양이었는지 말하며 잔을 비웠다. 그러곤 그 삶을 어떻게 열심히 굴리며 살았는지 말하며 다시 잔을 채웠다. 채우고, 비우고, 또 채우고. 이 행위는 인생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중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 자신을 위해 계속됐다.
양다솔의 우여곡절을 좇는 동안 집 안은 어두워졌고, 볼은 열꽃이 피는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차를 몇 잔 마셨을 뿐인데 몸 안에 뜨거운 기운이 가득했다. 어쩐지 내 안에서 모종의 용기가 솟았다. 발을 헛디뎌 어떤 불행에 빠진다고 해도 한 잔의 차를 마실 수 있다면, 그대로 주저앉지 않고 엉덩이를 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스스로를 대접할 줄 아는 사람이 준, 부드럽지만 힘센 온기가 앞에 놓인 잔에서 넘실댔다.


중 2 때부터 보이차를 마셨다고 들었어요.
저는 중학교 때 전교생이 30명인 기숙 대안학교에 다녔어요. 그런데 정수기 물이 갈색인 거예요. 알고 보니 교장 선생님이 보이차를 좋아하셔서 물 대신 보이차를 주신 거죠. 학교 안에 찻집으로 꾸린 공간과 전문 포차사도 계셨고요. 학창 시절에 훌륭한 선생님들의 집에서 생활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들도 모두 보이차를 드시더라고요.

중학생 때 가족과 함께 사는 집에도 작은 찻상을 들이고, 비용 분담까지 했다면서요?
차를 몇 달간 꾸준히 마시다가 집에 와서 안 마시니까 허전하더라고요. 제가 몸이 찬 편인데 보이차가 따뜻한 성질이어서 몸에 좋다는 것도 직접 느꼈고요. 그래서 찻상을 사고 싶었는데, 제대로 맞추면 몇십만 원이 훌쩍 넘어가요. 제가 각을 재보니 집 형편이 넉넉하지도 않고, 딱 보기에도 고급 취미니까 부모님이 쉽게 허락해주지도 않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비용의 절반을 지불하려고 용돈을 모아서 큰맘 먹고 이야기했어요. 부모님도 제가 옷에 돈을 쓰면 썼지 그런 곳에 돈을 쓰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나름 진정성을 봐주신 것 같아요.

어떤 가전, 가구는 생활의 풍경을 변화시키는 것 같아요. 찻상이 생긴 후 집의 모습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해요.
원래 셋 다 말이 많고 한가락씩 하는 사람들이긴 했는데요,(웃음) 차를 마시고 난 후에는 자연스럽게 항상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게 됐어요. 차를 마시면 몸도 열리고, 기분도 좋고, 보기에도 좋은 행위니 더할 나위 없었죠. 그 전에도 가족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고, 잘 싸우고, 잘 놀고, 친구처럼 지냈지만 차 마실 때만큼 깊은 대화를 나누진 않은 것 같아요. 술 마실 때와는 달리 차를 마시면 정신이 점점 맑아지고, 속도 편해지니까 오히려 힘이 생겨서 더 잘 싸운 때도 많아요. 그래도 다음 날이면 다시 찻상 앞에 앉아서 이야기하고 그랬어요.


다솔 씨 집을 봐요. 혼자 사는 자취방에 이렇게 큰 찻상을 갖춘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차라는 게 하나의 문화잖아요. 행위 자체를 하면서 얻는 것도 있고, 차를 마실 때 생기는 특유의 분위기와 대화도 있고요. 그래서 전 어떤 사람이랑 대화를 나누고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무조건 집에 데려와서 같이 차를 마셔요.

보통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 가구에 맞춰서 모이게 되잖아요. 식탁을 중심으로 모인다든가, 프레임 없는 침대를 쓰면 그 옆에서 널브러진다든가. 이 집에서는 찻상 주변으로 모이겠네요?
보통 독립할 때 ‘나는 부모님 집처럼 안 살 거야. 내가 원하는 대로 꾸밀 거야’ 생각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저는 이상하게도 꾸미고 싶은 대로 꾸미니까 옛날 우리 집이 되더라고요.(웃음) 찻상이 중심인 이 거실도 본가 거실의 원형을 살린 느낌이에요. 지금도 가장 그리웠던 시기를 꼽자면 부모님과 함께 그 집에 살던 때였던 것 같고요.

그럼 집 구할 때 차 마시는 공간을 염두에 두고 골랐겠네요?
집 보러 다닐 때 ‘여기서 살 수 있겠다’ 생각되는 집을 고르잖아요. 전 이 집 거실을 봤을 때 ‘여기서 차 마시면 너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창문 밖으로 나무가 보이고, 남향인 점도 좋았고요. 제게 일상에서 쉰다는 건 집에 돌아와서 차를 마시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런 공간이 확보되지 않은 곳은 기본적으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거죠. 사실 이사할 때 본인이 바라는 대로 조건을 갖춘 경우는 드무니까 자기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3개 꼽아보라고 하잖아요. 다 버리더라도 가져가야 할 요소를 꼽아보니 1번 차 도구, 2번 돌침대, 3번이 고양이더라고요. 그러니까 제가 차와 돌침대를 즐기면서 고양이도 돌볼 수 있으면 거기로 가야 하는 거죠.

돌침대 예찬은 익히 들었습니다.
돌침대에 의문을 품는 사람 중엔 실제로 자본 경우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친구들이 오면 누워 있으라고 해요. 그럼 깨닫게 되죠. 그리고 보통 사람들은 결혼할지도 모르고, 일을 계속할지도 모르고, 이사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짐을 안 늘리는데, 전 그런 압박이 없어요. 오늘 하루를 살더라도 모든 게 제 마음에 들어야 해요. 그래서 ‘혼자 사는데 이런 가구를?’ 하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죠. 제가 맥시멀리스트이기도 하고요.

돌침대도 그렇고 보이차도 굉장히 오랫동안 좋아한 거네요. 무언가를 오래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달라지는 게 있다고 생각하나요?
전 새로운 걸 기웃기웃하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요즘 무슨 영화가 좋다, 무슨 음악이 좋다, 무슨 책이 좋다는 걸 잘 몰라요. 잘 모르니까 알려달라고 말하는 사람에 가깝죠. 대신 직접 뭔가를 해보고 좋다고 느끼면 내 삶에 들어와요. 그리고 안 나가죠.(웃음) 그런 무시무시한 성향을 갖고 있죠.

오래 좋아하는 게 있으면 인생에 큰 줄기가 있는 기분이 들 것 같아요.
맞아요. 저는 차를 마신 후로 새벽에 일어나면 할 일이 있는 사람이라는 게 항상 좋았어요. 해 뜨기 전 거실에 앉아서 어두운 채로 차를 마시면서 해 뜨는 걸 보면 너무 좋거든요.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삶에서 이탈시키지 않고 계속 가져갈 힘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는 느낌이에요.

다솔 씨는 매일 차를 마시니 일상의 의식으로 자리 잡았을 것 같아요. 하루 중 언제 차를 마셔요?
주말에는 항상 이른 오후에 차를 마셔요. 우리 집 거실이 가장 예쁜 시간이 오후 2~3시라서, 청소하고 자연스럽게 여기 앉아요.

10대 때 2년 동안 절에서 행자의 삶을 살았다고 들었어요.
우리 가족은 무신론자였는데, 아빠가 ‘이 험한 세상 헤쳐나가려면 종교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종교 순례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아빠가 극도로 개인적 성향이거든요. 불교가 딱 맞았던 거죠. 처음엔 아빠가 저도 모르게 4박 5일 프로그램을 신청해서 절에 갔어요. 그런데 거기 풍경이 정말 무릉도원 같거든요. 이런 데서 한번 살아보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프로그램을 진행한 법사님이 할 일 없으면 여기서 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러죠, 뭐” 하고 살게 된 거예요. 그렇게 4박 5일 프로그램이 100일이 됐는데, 또 “넌 애가 덜 됐으니까 더 살아라” 하시기에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하는 식으로 2년이 됐고요. 저는 사실 그 후에도 계속 머물 생각이었는데, 절에서 대학을 권유해 나오게 됐어요.

2년 동안 절에서 뭘 했어요?
제가 지내던 절에 100명 정도가 살았기 때문에 일이 정말 많았어요. 공양하고, 예불하고, 불경 공부도 했고요. 온종일 할 일이 산더미라 자기 시간을 내기 힘들지만, 따로 개인 정진도 해야 하고요. 사실 개인 정진은 안 해도 뭐라고 하진 않아요. 보통 3개월 그렇게 지내면 도망가고 그러거든요. 그런데 저는 2년 동안 개인 정진을 한 번도 빼먹지 않았어요. 절에서 매번 제멋대로 하는 애라고 욕을 먹었는데, 그거라도 안 하면 안 될 것 같았거든요. 내가 한 말을 지킨 게 엄청나게 큰 자산이에요. 스스로 마음먹은 걸 끝까지 해본 힘으로, 그 후에 힘든 일이 있어도 잘 살았다고 생각해요.

가족과 사이도 좋았고 10대 때 집에서 산 시간도 길지 않았는데, 왜 스무 살이 되자마자 독립을 감행했어요?
아, 떨어져 지낸 게 사이가 좋았던 주요 원인이기도 해요! 가장 힘들었던 시절을 집 밖에서 보냈으니까요. 어릴 때부터 저는 “스무 살이 되면 알아서 살아라”라는 말을 듣고 컸어요. 다만 대학에 가고 싶다면 자립하기 어려울 테니 등록금은 못 줘도 집에서 살게는 해주겠다고는 하셨죠. 그런데 그즈음 아빠가 출가했고, 엄마랑 둘이 살게 됐어요. 아빠랑 엄마랑 셋이 살 때는 삼각형 모양으로 잘 지냈는데, 엄마랑 둘이 사니 관계가 직선이 되더라고요. 이런 식으로 엄마를 만나본 적이 없었는데, 알고 보니 우리가 좋은 룸메이트가 아닌 거예요. 완벽히 다른 관계가 되더라고요. 게다가 엄마는 어느 날 갑자기 과부가 된 건데, 제가 그 상태를 서포트해주지 못하니 서로를 더 갉아먹게 됐고요. 그 시기에 상담을 받았는데, 상담사가 독립하라고 조언을 해줘서 나와 살게 됐어요.


이 집을 구하기 위해 3개월간 직거래 사이트를 보고, 다솔 씨 기준으로 80점은 줄 수 있는 집이라 이사를 왔다면서요? 집 보는 안목은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요?
처음 자취방을 구할 때도 직거래 사이트에서 서울에 있는 모든 전세 알림은 저한테 오도록 설정해두고 하루 종일 봤어요. 좋은 집은 빨리 나가니까 직접 볼 기회가 생기면 아침 7시에 찾아가고 그랬죠. 이 집도 3개월 동안 매일 부동산에 전화하고, 앱을 보고, 직거래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구한 거예요. 엄마가 제 첫 자취방을 구할 때 이렇게 말했어요. “정말 마음대로 안 되는 게 많은 인생인데, 집이라도 들어오고 싶은 곳이면 좋겠다.” 전 그 마음이 너무 고맙고, 너무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내 공간은 마음의 중심을 잡는 곳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자기 집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과 통하는 면이 있어요. 그런데 ‘이보다 좋은 집이 있겠어?’ 하고 계약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더라고요. 저는 늘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 ‘이 정도로 타협하려 해? 난 더 좋은 집을 찾을 수 있어!’ 하는 마음으로 집을 보죠.

대학교 휴학하고 ‘스리 잡’을 뛴 적도 있고, 높은 시급을 받기 위해 편의점 야간 알바를 한 적도 있다고 들었어요. 그렇게 열심히 일해도 생활비와 월세, 공과금으로 야속하게 빠져나가고··· 나를 갈아 넣어도 빈 구멍만을 마주하게 되는 시간이 있잖아요. 그 구멍에 빠지지 않고, 건널 수 있게 해준 힘은 뭐였어요?
저에겐 항상 ‘혼자서 내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어요. 그런데 스리 잡을 뛰고 이래저래 애쓰다 보니 집에서 도움을 받지 않고도 사람처럼 살 수 있는 거예요. 일단 그게 경이로웠다고 해야 할까요? 안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또 가족과 살 때는 내 방만이 내 세계잖아요. 그런데 그 세계가 집 전체로 확장되었을 때의 기쁨이 있었죠.

짧지 않은 자취 기간 동안 다솔 씨 몸과 마음에 어떤 굳은살이 붙은 것 같나요?
저에게 사회에서 성공과 진로에 대해 묻는다면 “몰라요~”라고 하겠지만, 의식주에 대해선 굉장히 열정적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힘들게 일하면서 생활비를 번 것도 당연히 치러야 하는 값이었다고 생각해요. 물론 많은 사람이 그저 기초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혹독한 값을 치러야 한다면 우리 사회에 문제가 있는 거겠죠. 저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단순히 살기 위해 너무나 많은 시간을 노동하면서 써야 하네’라며 원망했을 수도 있어요. 다만 ‘노동자의 삶은 이따위구나. 다들 좆같네, 하면서도 견디고 있는 거구나. 정말 모두 대견하네’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런 과정이 없었으면’ 하고 바라진 않았어요. 많은 사람이 이렇게 살고 있으니 나에게도 이런 시기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죠. 또 그 시기가 없었다면 제가 정말 독립한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을 거예요. 그러고 나니 저도 자기를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뒹굴어본 사람을 좋아하게 되더라고요.

처음 이 집에서 느낀 이미지는 ‘이건 보통 살림 솜씨가 아니다’였어요. 저는 제가 슬플 때 감정을 가시화해서 볼 수 있어요. 왜냐하면 집 안이 엉망이 되거든요. 그런데 다솔 씨는 여러 곡절 속에서도 항상 집은 정돈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 같아요.
제 성격이기도 한데요, 어차피 해야 할 일이면 처음부터 잘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고, 경지에 오른 다음 편하게 사는 편이에요. 예를 들면 화장을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면 몇 년 동안 미친 듯이 노력해 실력을 높이고, 그 후에는 대충 해도 잘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버리는 거죠. 처음 자취할 때 요리도 살림도 정말 하기 싫을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처음엔 돈을 엄청 들였어요. 그중에서도 예쁜 게 있고, 예쁜 걸 사면 만지고 싶고, 요리를 할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거죠.


1년 전 다솔 씨는 친구의 권유로 한순간에 비건이 됐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어요?
친구들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고기를 맛있게 먹었는데, 어느 날 애들이 고기를 안 먹기 시작하고, 갑자기 한 친구는 화룡점정처럼 《아무튼, 비건》이라는 책을 사서 건네더라고요. 그때 ‘올 것이 왔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느 날 친구들과 몸담은 세상이 달라진 거죠. 그런데 저는 이 사람들과 같이 사는 게 너무 중요했어요. 내가 지닌 정신적인 마을이나 다름없는데, 어느 날부터 옆집 사는 애랑 밥을 못 먹게 된 거예요. 저는 지금까지 아무리 잘 맞은 사람도 언제나 ‘지금부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지금부터 안 통하면 예전에 친했던 사람이 되는 거죠. 그래서 ‘별수 있나. 해야지 어쩌겠니’ 하고 시작하게 된 거죠.

인간의 어떤 부분은 변하고, 어떤 부분은 절대로 변하지 않잖아요. 나이가 들수록 변하지 않는 쪽이 커지는데, 다솔 씨는 자신을 열어놓고 산다는 뜻이네요.
사실 세상에 진짜 옳고 그른 건 없으니 자기가 믿고 싶은 걸 믿는 거잖아요. 저는 제가 신뢰하는 친구들의 선택을 많이 믿어요. 그렇게 하고 후회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가끔 친구가 무섭다고 해요. 자기 자신보다 자기를 더 믿는다는 느낌을 받는다고요. 그러면 저는 “그러니까 아무거나 함부로 하지 마라. 네 인생에 들이는 무언가를 네 인생에만 들인다고 생각하지 마라”고 얘기하죠.(웃음)

올해는 비건이 된 것만으로도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는데, 비건을 실천하는 일이 주는 무게가 느껴졌나요?
제가 절에 있을 때 제일 잘한 건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킨 거라고 했잖아요. 저는 그 경험이 준 힘이 크다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두 번 다시 그런 생활은 못 할 것 같았어요. 내가 원하는 대로 목표를 세우고 그대로 사는 거, 너무 어렵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비건이 되겠다고 결심한 뒤로 제가 정말 정성껏 실천하고 있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축소된 삶을 살거나 축소된 음식을 먹지 않고 오히려 확장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요. 그래서 스스로 감동 먹은 것 같아요. 사실 삶에 있어서는 비건이든 어떤 사회적·환경적 문제든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요. 결국은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모시고 사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 같거든요. 저에게 비건 지향의 삶은 나에 대한 신뢰를 다시 찾는 과정이었어요. ‘나는 아직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볼 수 있구나’ 다시 확인한 거죠.

누군가 나의 밥상에 오르기 위해 죽었다면 ‘외롭다’는 말을 할 자격도 없다는 글을 읽었어요. 비건을 시작한 후 여전히 혼자 밥상에 앉지만 혼자가 아님을 느낀다고요. 이제 정말 덜 외로운가요?
제 20대 초·중반의 전반적인 서사는 자조와 외로움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자기 생각으로만 가득했던 사람이 달라진 거죠. 음식에 관해서는 배부르고, 맛있고의 문제 영역에서만 머물던 사람의 세계가 완전히 확장된 거고요. 그래서 자신이 너무 마음에 들고, 내가 늘 이런 나였으면 좋겠고, 그 순간 혼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돼요. 단순히 내게 친구가 있다거나, 실제로 옆에 체온이 있느냐로 외로움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 내 생각을 확장할 수 있다는 점이 외로움에서 나를 구원하는 거예요. 그래서 비건은 저처럼 외로움을 많이 느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행동 방식인 것 같아요. 나만 세상에 사는 게 아니라는 걸 늘 느낄 수 있고, 계속해서 타자를 생각하며 결정할 수 있으니까요.


Conditions

지역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구조 다세대빌라 투룸
면적  43㎡(약 13평)
보증금 1억 7000만 원(중소기업 청년전세자금대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