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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밥은 큐레이션이다

Home Meal as a Curation

집밥은 큐레이션이다

Writer. Mikyong Shin / Illustrator.Subin Yang Article / essay


처음 자취를 시작했을 때 6평 원룸에서 살았다. 빌려 쓰는 공간의 월세는 부담스럽고, 혼자인 나는 외롭고 세상은 낯설기만 했다. 플라스틱 생수병 빼곤 든 것도 없는 미니 냉장고(풀 옵션 방이라는 이유로 붙어 있었다)가 시끄럽게 떠들던 곳. 잠을 방해하는 냉장고 플러그를 뽑았던 기억을 마지막으로 부엌은 죽은 공간이 되었다.
그곳은 집이라기보다 ‘방’에 가까웠고 생활 요리를 한다는 건 그야말로 사치였다. 물리적 공간으로 요리하기에 결코 부족하진 않았지만 그때의 나는 생활을 돌본다는 개념 자체가 부족했다. 꿈을 위한 직업적 자리매김이 중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명절이 돌아오면 부모님 댁에 갔다. 사회생활을 하는 어른의 탈을 쓰고 살기 시작한 뒤로 고단하고 불안한 날이 계속되었지만 부모님 앞에선 힘든 내색 없이 웃는 낯을 보였다. 모든 게 괜찮다고 말이다. 부모란 눈앞에 자식이 보여도 걱정만 하는 법이니까.
그런 엄마가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늘 밥상에 있었다. 명절이면 혼자 새벽부터 움직여 커다란 상을 음식으로 가득 채웠다. 자식들을 먹이겠다는 강한 일념 하나로 바삐 움직인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해산물 요리, 맛깔나게 무친 초무침, 오빠를 위한 갈비찜과 백숙이 뚝딱 차려졌다. 그러나 그러한 기름진 한 상 차림은 내내 굶다가 어쩌다 밥을 얻어먹는 사람처럼 허겁지겁 먹게 했다. 신나게 먹었지만 다 먹고 나면, 속은 버겁다고 아우성이었다. 오히려 명절 다음 날 먹는 몇 가지 밑반찬과 된장국이 몸에 맞았다. 자라면서 자주 먹은 일상식, 그리운 집밥의 맛은 오히려 이쪽이었다.


엄마는 여러 채소와 과일을 키워 먹는다. 마당 있는 주택이라면 으레 있는 감나무도 여러 그루고 무화과, 사과, 대추나무도 한두 그루씩 있다. 게다가 이국적인 헤이즐넛도 자란다. 밭에는 상추, 깻잎, 대파, 고구마 등이 있다. 나의 집밥은 근사하게 말해서 팜 투 테이블(farm to table) 체계로 운영되는 엄마를 따라갈 수 없다. 물론 그런 엄마의 살림도 할머니와 비교하면 도시화한 편이다. 커다란 돌절구로 고춧가루를 빻고, 장작불로 가마솥 밥을 하던 할머니를 기억한다.
내 미각의 기억은 할머니의 밥상을 최고로, 엄마의 밥상을 두 번째로 여긴다. 어린것이 여간 잔망스럽지 않은가 싶지만, 손이 많이 갈수록 더 맛있음을 어린 나이에도 알았다. 그래서 내게 시골 밥상은 가장 화려한 맛이다. 소박하다니! 그럴 리 없다. 밭에서 손수 기른 채소가 영양소 손실될 시간도 없이 곧바로 찬이 되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신선하고 질 좋은 식사란 그런 모습이다.
지금은 TV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에서나 볼 수 있는 희귀한 풍경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품이 많이 든 귀한 밥상, 나는 운이 좋아서 그런 식사를 하며 자랐고, 집밥의 그리움은 자연히 자연으로의, 가족으로의 회귀가 되었다.


지금 이 시대에 육신의 허기는 넘쳐나는 무엇으로든 달랠 수 있다. 그러나 배고픔만을 해결하기 위한 식사에선 결국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차려준 정성 담긴 밥에 굶주려 있다. 집밥을 내세운 프랜차이즈점 음식에 혹하고 편의점 도시락에 혹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차갑고 정제된 음식으로 영혼의 허기를 채우기란 쉽지 않다. 무엇을 잘 먹는지, 요즘 부족한 영양소가 무엇인지, 요리하는 사람이 먹일 사람을 생각하며 만드는 집밥엔 고유의 손맛과 따뜻함이 따라오게 마련이다. 그와 같은 이유로 나는 종종 친구들을 불러 나의 집밥을 나눈다. 자취하는 친구에겐 마치 엄마처럼 챙겨주며 기쁨을 나누고 있다. 친구를 아끼는 마음은 요리에 담기고, 친구는 그 요리의 맛에 긍정한다. 한솥밥 먹는 사이, 마음의 거리는 집밥으로 더욱 가까워진다.




가족으로부터 분리된 혼자에게 나만의 집밥이란 결국 큐레이션이다. 가족 전통의 맛을 바탕으로 여행, 외식 등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여러 맛을 혼합해 완성한다.


취향껏 차려낸 밥상은 실패할지라도 빈번한 감동을 준다. 돈을 버는 일만큼 나를 먹이는 일 또한 굉장한 생산 활동에 속하니까.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손을 거쳐 식사를 준비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반찬 가게에서 사 온 음식이라도, 홈쇼핑에서 주문한 반조리 음식이라도 약간의 정성을 더해 결국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간단하게 만들지언정 고른 영양을 생각해 소중한 나의 몸에 대접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한 집밥에는 마법 같은 힘이 있다. 요리에는 삶을 살아내게 하는 힘, 생의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다. 제법 거창하다고? 혼자인 인간처럼 불완전한 존재는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괜찮은 하루는 집밥이 주는 위로 덕분이다. 추운 겨울 옹송그리며 돌아온 집, 온기 하나 없는 쓸쓸함도 잠시, 밥통은 내 옆에서 활기차게 소리를 내며 증기를 내뿜고 온기를 전한다. 나는 채소를 씻고, 도마에 올려 통통통 파를 썬다. 이른 저녁 엄마가 부엌에서 내던 그 소리가 난다. 나를 챙겨주고 지켜주는 다른 존재, 바로 가족이 있다는 안정감을 담은 소리다.


작가 조이스 메이너드는 “좋은 집이란 구입하는 것이 아닌 만들어지는 것(A good home must be made, not bought)”이라 말했다.


집이 거대한 짐 보관소에서 온기가 느껴지는 가정으로 바뀐 건 부엌이 일상의 중심이 된 후다. 맛있는 식사와 대화를 찾아 바깥으로 돌던 나를 집에 머물게 해준 부엌. 멋진 장소를 찾기보다 내가 지금 머무는 곳을 편안한 환경으로 바꾸자 만족스러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집밥의 그리움을 좇다 보니, 어느새 작은 자취방이 혼자 꾸려가는 아담한 가정집이 되었다. 오랜 시간을 거쳐 찾은 아름다운 세레나데다.



심미경

중독자로 살다가 건강을 잃었다. 위기를 느낀 뒤로 적게 가지고 바르게 사는 삶을 가꿔나가고 있다혼자서도 건강하고 우아하게 챙겨 먹는 집밥 푸드 에세이 《혼자의 가정식》나를 지키는 루틴 모음집 《뿌리가 튼튼한 사람이 되고 싶어》 등을 통해 몸과 마음이 튼튼해지는 일상을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