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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면이 취향을 규정한다

Floor Plans Define Tastes

도면이 취향을 규정한다

Writer. Hyuna Lee / Illustrator.Subin Yang Article / essay


밀레니얼 세대의 집을 취재하면서 다양한 사람의 집에 가볼 기회가 있었다. 이들의 집에 가는 건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선물 상자를 여는 것과 다름없었다. 비슷한 브랜드의 가구와 가전을 쓰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만큼 그야말로 하나하나 취향의 고군분투가 느껴지는 집이었다.

<디렉토리> 인터뷰에는 집 구조도가 필수로 들어간다. 보통 취재를 하러 가면 구조도를 직접 그리는 편인데, 처음에는 어렵던 이 일이 꽤 익숙해졌다. ‘도면 그리는 데 재능이 있나 본데?’ 하며 혼자 우쭐해하던 순간, 뭔가 착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저 집 구조가 비슷했던 것이다. 그러자 내 발치에 물음표 하나가 떨어졌다.

‘돈과 시간을 쪼개 집을 꾸려나가던 나도, 그들도
사실은 똑같은 상자 속에 갇혀 있는 게 아닐까?’


그건 마치 세계의 모양을 알아버린 트루먼의 기분과 흡사했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모양에도 정해진 한계가 있는 건 아닐까 궁금했다.

<디렉토리>에서 만나는 청년들은 주로 다세대주택 원룸 혹은 투룸, 원룸형 오피스텔, 반지하, 옥탑방에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붉은 벽돌의 다세대주택·다가구빌라다. 2020년 2월까지 만난 인터뷰이 중 33명, 즉 50%가 넘는 사람이 거주하는 형태다. 이 건물들은 대부분 1980년대 개발 시기에 빠르게 지은 ‘집 장사’ 집이다. 기성세대가 돈을 벌기 위해 지은 집에 청년들이 ‘기생’하고 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청년들의 가벼운 주머니 속에 들어앉은 건 바로 기성세대가 아닌가. 나는 그들이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네 상자의 모양은 정해져 있어.”

청년들이 살고 있는 상자 모양을 살펴보자. 다세대주택 투룸. 문을 열면 현관이 나오고, 거실이라고 부르기에는 좁은 공간과 그와 이어진 부엌이 나타난다. 방 2개 중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다. 큰 방은 보통 침실로 쓰고, 작은 방은 ‘왕자 행어’를 둔 옷 방 또는 각종 짐을 보관하는 보조 방으로 사용한다. 둘이 사는 경우라면 보증금과 월세 기여도에 따라 방을 나눠 쓴다. 이 공식에서 벗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현재 내가 사는 집도 앞서 설명한 다세대주택과 거의 흡사하다. 다만 거실이 이상할 정도로 좁고 긴 직사각형이다. 일반 소파를 놓으면 공간을 삼킬 듯하고, 4인용 테이블과 의자를 놓으면 꽉 찬다. 나는 이 애매모호한 장소에 책장 하나 둔 후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해왔다. 처음에는 거실이라는 이름과 어울리도록 좌식 소파와 카펫을 구매했고, 책상을 두고 작업실로 사용해보기도 했다. 부엌 식탁을 끌고 와 다이닝 룸 흉내를 내보기도 했다. 하지만 뭔가 아쉬운 기분을 지울 수는 없었다.

이 집은 동향이라 이른 아침에 해가 들고 점심이 되면 꼬리를 내리고 사라진다. 어느 날, 나는 눈이 부셔서 일어나는 기분을 느껴보기 위해 침실로 쓰던 방에서 매트리스를 빼내 거실 창문 앞으로 옮겼다. 그 집에 산 지 3년이 넘었을 무렵, 처음으로 알람이 아닌 햇빛에 의해 눈을 떴다. 그날부터 나의 직사각형 거실은 침실이 되었다.

‘매트리스만 옮기면 되는 일이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거실에 가장 양질의 빛이 든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3년이나 구조의 명령에 따라왔다. 거실은 잠시 머무르거나 누군가가 올 때 맞이하는 공유 공간이지 사적 공간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투룸 이상의 공간에서 거실을 침실이나 다른 용도로 쓰는 경우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여름빛이 완전히 사그라들 때까지 커다란 거실 창문 앞에서 잤다. 잠도 잘 오고 깨는 기분도 훨씬 좋았다.

방의 용도를 바꿔서 만들어낸 이 작은 균열은 내게 세입자 이상의 주인 의식을 심어줬다. 임대차계약서 상에서 나는 여전히 임차인이지만, 집을 지휘하고 있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런데 내가 이런 행동을 하는 데에도 분명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대청마루가 있고 아궁이에 불을 때는 한옥 주택에서 태어났다. 그 집에서 7년을, 같은 자리에 지은 2층 주택에서 10년을 살았다. 대문을 잠그는 일이 없는 시골 동네였다.
그곳에서 나는 늘 집보다 넓은 평수를 살았다. 평생 세입자로 살다 간 건축가 정기용이 자신의 명륜동 집은 임대계약상 31평이 아니라 동네 일대를 포함해 약 50만~100만 평이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동네 뒷동산의 무덤가와 목장은 겨울이면 썰매장이 되었고, 가을이면 벼 수확 후 네모난 볏짐으로 가득한 논에서 레고를 쌓듯이 집을 만들며 놀았다. 여름이면 마당에서 우산으로 텐트를 만들고, 동네 애들의 집에 놀러 가면 비밀의 문처럼 생긴 벽장과 다락방에서 숨어 나오지 않았다. 유년기의 집은 매번 크기와 형태가 달라지는 곳이었다. 그러나 아파트 키즈로 태어나고 자란 동년배 청년들도 이런 상상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친구들은 1990년생인 나를 1970년대에 태어난 사람 보듯 하기 때문이다.

베란다가 딸린 16평 투룸을 청산하고 10평 남짓한 원룸형 오피스텔로 가는 한 친구는 이런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투룸 살다가 원룸으로 이사 가다니, 내 인생 실패한 거 아닐까?” 분명히 벌레, 누수, 곰팡이, 정화조와 하수도 악취 등 날림으로 공사한 ‘집 장사’ 집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문제에 지쳐서 내린 결정인데도 친구는 사회에서 자신의 주거 형태가 어떻게 평가받을지 신경 쓰고 있었다.


반지하에서 지상으로, 원룸에서 투룸으로, 빌라에서 아파트로 옮겨가는 삶. 주거 건물에는 앞서 나열한 순서대로 일종의 위계질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대학교를 졸업하고 ‘멀쩡한’ 직장에 취업해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인생을 종용받는 것처럼 주거에서도 유사한 가치관과 취향이 이미 우리 머릿속을 점령한 건 아닐까? 나는 친구의 말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이처럼 서울의 주거를 꿰뚫는 한 가지 특성은 ‘획일성’이다. ‘집 장사’ 집부터 빌라, 아파트, 정부 주택 지원 사업 아래 있는 공공임대주택까지 모두 내부 도면이나 공간 레이아웃이 비슷비슷하다. 도면만 읽어도 공간의 쓰임을 파악할 수 있다. 사람의 삶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이 아니라 설계, 건설, 판매의 편의성을 염두에 두고 지었기 때문이다.

나는 유년기에 공간을 자유롭게 삶에 대입해본 대안적 경험이 있는데도 거실을 침실로 바꾸는 작은 균열을 만드는 데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공간을 창의적으로 향유하거나, 정해진 쓰임의 명령을 거부하는 사례를 다양하게 보고 자란 사람이 아닌 이상 이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상상해보자. 만약 거실에 소파와 TV, 티 테이블, 카펫을 놓을 수 없다면 그 공간을 어떻게 채워나갈 것인가? 거실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곧장 소파 맞은 편에 네모난 상자가 놓인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이렇듯 도면은 공간 레이아웃을 그려놓은 그림 그 이상이다. 도면은 우리의 동선과 행동을 규정짓는다.

저마다 자신만의 취향대로 공간을 향유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어떤 브랜드의 소파와 거실장을 살지 고민하거나 몇 인치짜리 TV를 살지 고민하는 일도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광범위하게 포장된다.

모두의 머릿속에 같은 구조도가 존재할 때는 상대평가도 쉬워진다. 거실 평수가 얼마나 넓은지, TV가 얼마나 큰지 비교하는 것 말고는 공간의 가치를 어떻게 측정해야 할지조차 모를 수 있다.



획일적 도면이 위험한 이유는 다양한 삶의 방식과 생활 방식의 가능성, 자신만의 가치 기준을 상상하도록 독려하기보다 비교와 경쟁 방식으로 자기 인식을 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가장 획일성이 짙은 아파트는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력을 확보했다는 성공의 상징”이자 “중산층이 되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거의 예외 없는 욕망의 대상”(≪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류동민, 66쪽)이었다.

그러나 남들처럼 살고 싶고, 남들처럼 보이고 싶다는 욕구를 채운 후에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아파트를 원하는 건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를 착각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이 원하는 삶의 모양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그 모양을 채울 취향을 키우려면 이를 연습하고 실패할 수도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칠레의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Alejandro Aravena)는 획일성에 의문을 품었다. 그는 저소득층이 집을 살 수 있도록 골조만 짓고, 나머지 반은 입주자가 살면서 증축할 수 있는 구조로 공공주택을 설계했다. 기본 틀은 같지만 개인의 취향에 따라 집 모양은 조금씩 다르게 완성된다.


내 삶을, 내 취향을 건축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그것은 도면에 숨은 은밀한 명령에 따르지 않는 데서 오기도 하고, 완벽하지 않은 반쪽짜리 집에서 오기도 한다.


또한 획일화된 구조라 할지라도 집에 여백이 있다면 공간에 대해 상상하게 된다. 그 여백은 넓은 평수가 아니라 통풍, 조망, 채광이 보장된 최소한의 주거권을 확보하는 것에 가깝다.

앞서 언급한 건축가 정기용은 “한 건물에는 도시 전체가 숨어 있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청년들을 위한 건축가, 자본가, 정치가의 역할은 모두를 같은 상자 속에 집어넣는 게 아니라 가장 유연하고 말랑말랑한 상자를 만들어주는 일일 것이다.

이현아

프리랜스 에디터. 예술에 대한 다양한 글쓰기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