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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사랑하면 결혼하고, 덜 사랑하면 동거 하나요?

Do You Marry If You Love More, and Live Together If You Love Less?

더 사랑하면 결혼하고, 덜 사랑하면 동거 하나요?

Writer.Manchun Jeong / Illustrator.Subin Yang Article / essay

여자 나이 서른을 훌쩍 넘기면 ‘남 걱정 나눔 대잔치’의 주된 수혜자가 된다. 물론 나도 서른이면 무엇이라도 되어 있을 줄 알았다. 정신 연령은 10대인데 몸만 30대로 변하는 것인 줄 어찌 알았으랴! 30대가 되어 나를 걱정하는 것이 비단 나뿐만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한 이웃에게 사랑의 연탄 대신 걱정을 나누어준다. “결혼은 언제 할 거니”, “노산이면 힘들 텐데”, “너무 계산적으로 굴지 마라” 같은 것이다. 걱정을 주섬주섬 주워섬기다 보면 유니세프 광고에 나오는 아프리카 짐바브웨 아이처럼 처연한 표정을 지어야 할 것 같다. 동정할 거면 돈으로 달라! 그럼 내게 월 3만 원씩 기부하는 그들에게 사무실 책상에 불쌍한 내 사진을 전시하도록 허하겠다. 자, 그럼 잠시 그들의 걱정 후원 모습을 감상해보자. 


 “살아보면 남자들 다 비슷비슷해.
너무 까다롭게 굴지 말고 적당한 놈 잡아 결혼해.”

 “다 비슷비슷해?”

 “그럼.”

 “몇 명하고 살아봤어?”

 “어휴, 얘가 무슨 소리를 하니!”

 “그런데 비슷비슷한지 어떻게 알아?”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면서 대처하는 법은 잘 모르지만, 꼰대에게 꼰대의 방식으로 답하는 방법은 하나 알았다. 이름하여 ‘내가 해봐서 아는데’다. 

“내가 여러 명하고 살아봐서 아는데, 사람마다 다 달라!”


스무 살부터 지금까지 10년이 넘는 동안 참 많은 사람과 연애를 했다. 썸만 탄 사람은 한 트럭, 사귄 사람은 봉고차에 태울 정도, 같이 살아본 사람은 세단에 태울 정도로 만났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네 명. 물론 지금도 연인과 함께 사는 중이다. 누가 보면 연애 중독자고, 또 누가 보면 무난한 수준이겠으나, 외국인이나 미성년(?)과의 연애나 또 요즘 유행한다는 폴리아모리 polyamory도 시도해본 적 없으니 이 정도면 ‘합리적 보수’에 가깝다고 억지를 써본다. 동거를 네 번이나 했으면 발랑 까진 게 아니냐고 생각하는 그대, 혹시 동거라고 해서 질펀한 섹스를 생각한 건 아닌가?


하나, 동거를 ‘안’ 하면 문란해집니다.

우리나라에서 결혼 전에 하는 동거가 쉬쉬해야 할 무엇으로 여기는 까닭 중에는 혼전 순결에 대한 판타지가 한자리를 차지한다. 결혼 상대가 과거에 어떤 연인을 만났을 수 있다는 게 당연한 것이라면, 그가 과거에 다른 연인과 섹스를 했을 것이라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다면 섹스는 괜찮고 동거는 문란한 것이라는 이유는? 글쎄, 자주 할 수 있어서?

자유로운 섹스를 상상한 사람에겐 미안하지만 섹스는 동거보다는 연애와 친한 단어다. 연애가 스노우 어플로 찍은 뽀송뽀송한 셀카라면, 동거는 갤럭시 8로 찍은 무보정 실사랄까. 화질은 좋은데 보정이 되지 않아 온갖 잡티가 다 보이는 셀카. 아침에 그(그녀)가 모닝 토스트와 커피를 머리맡으로 가져다주는 20세기적인 상상이 눈곱과 입 냄새에 어떻게 산산조각 나는지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언제든 만질 수 있는 것보다 대실 4시간을 아끼고 아껴가며 서로를 더듬다 헤어지는 것이 섹스에 대한 애틋함을 키운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동거를 했더라면 한 달도 못 가 헤어졌다’에 내 하루 생활비 전부를 건다.


오히려 동거는 섹스보다는 생활의 공유, 정서적 교감, 경제적 제휴에 가깝다.


동거를 하면 서로의 몸보다는 경제관념, 생활 습관, 가치관을 더 많이 알게 된다. 치약을 끝까지 짜서 쓰는지, 화장실은 깨끗하게 사용하는지, 내가 요리를 하면 청소를 하는 눈치는 있는지, 날씨가 궂으면 우울한지, 그에게 진짜 휴식이란 롤을 하는 건지, 낮잠을 자는 건지 알게 된다. 동거는 상대를 보다 깊숙이 알게 해준다. 섹스보다는 포옹을, 열정보다는 애정을 가지게 되는 것이 동거다.




둘, 남자들? 여자들? 거기서 거기가 아니다.

웬만하면 아무나 골라잡아 결혼하라고 말하는 이들은 사람이 다 거기서 거기라고들 한다. 일부다처제를 감당하는 아랍의 부호가 그런 말을 했다면 모를까. 고작 한 번, 한 명과 살아봤을 뿐이면서! 나 역시 고작 네 명하고 살아봤을 뿐이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네 명 모두 달랐다. 네 명이 달랐을 뿐 순위를 매기기는 어렵다고 훈훈하게 끝내고 싶지만, 진실은 언제나 더 불편한 법. 더 좋은 사람과 덜 좋은 사람은 없었을지언정, 더 잘 맞는 동거인과 덜 맞는 동거인은 있었다.

같이 살기에 가장 잘 맞았던 연인은 사소한 생활 습관은 달랐지만 서로의 영역에 대해 존중해주는 사람이었다. 정리벽이 있는 나는 물건을 제자리에 두지 않았다고 연인을 타박했다. 깨끗한 주방에 애착이 있는 그는 설거지를 바로바로 하지 않는 나 때문에 고생을 했다. 이런 문제로 다투긴 했지만,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는 늘 응원과 존중을 표해주었다. 반면 지금 돌아봐도 그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는 상대도 있다. 꼼꼼한 집안일과 했다 하면 12첩 반상을 내오는 요리 솜씨로 현부양부 賢父良夫 소리를 들을 법한 사람이었지만, 자기주장이 너무 강해 대화와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그와 함께하고 싶다는 이유로 결혼을 했더라면 아마 나는 지금쯤 지난한 이혼 과정 속에서 가족을 설득하느라 혼이 쏙 빠졌으리라. 네 명과 함께 살면서 나는 어느 정도 ‘이런 사람과 평생 함께하고 싶다’라는 확신이 생겼다. 내 이상형은 ‘대화와 타협이 가능한 사람’이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와 결혼하지 않는 이상 자신과 꼭 맞는 사람과 살 수는 없다. 서로 맞춰가기 위해서는 양쪽이 그럴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걸 다른 사람과 살면서 깨달았다. 한 번의 동거가 열 번의 연애보다 상대에 대해, 또 나에 대해 깊이 아는 지름길이었다.


연애 후 결혼으로 직진하는 친구들에게 종종 묻는다.  “결혼하고 싶은 이유가 뭐야?” 열에 아홉은 “함께 있고 싶어서”라고 대답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사랑하고 함께 있고 싶어서 같이 산다. 누군가는 결혼하기 전 상대에 대해 잘 알고 싶어 동거를 먼저 할 수도 있지만, 내게 동거는 ‘준비’도 ‘테스트’도 아닌 지금 연인과 관계 맺는 ‘상태’다. 매일 아침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며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만, 그의 집에 가서 전을 부치고 싶지는 않은 이기적인 마음이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수반되는 가족 관계의 확장, 그에 따른 의무와 책임까지 질 자신은 없다. 더 많은 책임을 약속하는 결혼을 하고 상대를 방기하는 것보다 책임질 수 있을 만큼만 감당하고 약속을 지키는 것이 옳지 않은가. 결혼까지 생각했다는 말이 그 사람을 가장 많이 사랑했다는 뜻으로 갈음되곤 하지만, ‘얼마나’ 사랑하느냐가 ‘어떻게’ 함께하느냐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동거는 사회가 가르치는 모범적 루트에서 벗어나 있기에 동거를 하면 자연스레 편견에 노출된다. 이웃집 아주머니와 동네 앞 슈퍼 주인은 우리를 자연스레 신혼부부 취급하고, 가까운 사람들은 그럴 거면 결혼하라는 따스한 걱정 나눔을 한다. 그들을 설득할 필요는 없다. 삶의 다른 선택과 마찬가지로 동거 역시 선택하는 것이지 허락받아야 하는 일은 아니다. 그들의 걱정 나눔이 정 마음에 불편하거든, 그대도 걱정 나눔에 동참해보라. 그 댁 아이가 그 성적으로 대학에는 갈 수 있을지, 가정이 있으신 분이 집에는 일찍 일찍 다니셔야 하는 게 아닌지 걱정해주자. 이웃 사랑 나라 사랑이다.

어쩌면 내가 아직 서른의 몸에 들어간 10대의 정신 연령이라 이렇게 철없이 사는지도 모른다. 이러다 말년엔 지난 연인들의 추억이나 다 쓴 티백처럼 우려내다 쪽방에서 고독사할지도…. 티끌만큼 남은 젊음을 뽕브라 할 때처럼 모아 모아 결혼을 위해 불사르는 게 현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랴. 코끼리는 코끼리로, 하마는 하마로, 나는 나로 태어나버린 것을. 마지막까지 나는 이렇게 살다 죽으리라. 알아가고, 사랑하고, 함께 살고, 싸우고, 화해하는 지긋지긋한 일을 매번 새롭게 반복하리라.





정만춘

밥이 나오고 떡이 나오는 글을 쓴다. 잡지 발행인으로 종로에서 문화 공간도 운영한다. 한시적 비혼주의자이자 동거예찬론자로 인생 한 번 살 것처럼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