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dmark wordmark

logo logo

인덕원의 수상한 여자

In Deok Won’s Strange Woman

인덕원의 수상한 여자

Writer.Hyein Lee / Illustrator.Subin Yang Article / essay

어쩌다 보니 6년 내내 천 川 가까이에 산다. 이전엔 안양천, 지금은 학이 많이 서식한다고 해서 이름 붙은 학의천 주변에 살고 있다. 인덕원 작은 아파트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고, 서울에 공동 작업실이 있지만 대체로 집에서 일하는 편이다. 관찰과 의심이 취미인지라 수상한 탐정처럼 동네를 거닐며 새로운 풍경을 발견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의 산책길은 주로 학의천. 먼저 그곳에 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학의천은 물가를 중심으로 두 종류 길로 나뉜다. 한쪽은 자전거를 타거나 러닝하기 좋은 푹신한 길로 조성되어 있고, 한쪽은 드문드문 들풀과 돌이 있는 흙길이다. 하나로 통일하지 왜 이렇게 길을 나누었을까 고민해봤더니 만약 내가 개라면, 달리는 자전거가 없고 자연의 냄새가 진한 흙길을 더 좋아하겠다 싶었다. 아닌 게 아니라 개와 산책하는 이들 대부분이 그곳을 거닐었다. 나는 주로 깨끗이 정리된 길을 걷다가 중간에 돌다리를 건너 흙길에 오래 머무는 편이다. 강아지 뒤꽁무니 쫓아가는 게 나의 오래된 취미다. 걷다가 힘들면 최고의 그늘인 수양버들 아래에서 쉬어 가면 된다. 이쯤 되니 내 직업이 궁금할 테다. 나도 그렇다. 평일 오후 학의천을 한가로이 걷는 사람을 보면 불쑥 붙잡고 “도대체 뭐 하시는 분이에요?”라고 묻고 싶어진다.

나는 에디터인 동시에 의류 브랜드 대표로, 투잡을 뛰고 있다. 그런데 나처럼 태평한 투잡녀(?)가 또 있을까 싶다. 웬만하면 인터넷 서점이나 근처 서점에서 책을 살 법도 한데 꾸준히 도서관을 이용한다. 물론 돈이 궁한 경우일 때가 많지만, 아무튼. 우리 집에서 걸으면 20분 정도 거리로, 그리 짧지 않은 길을 걷노라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아까 말한 학의천의 두 길을 기억하는지? 인덕원의 구획도 그런 식으로 되어 있다. 도로 하나를 끼고 한쪽은 술집, 음식점, 성당 등이 짬뽕되어 있는 어수선한 마을이고(예상할 수 있듯이 내가 사는 곳이다), 반대쪽은 카페 거리라고 부를 정도로 세련된 카페가 많고 아담한 산과 주택이 잘 어우러진 마을이다. 그리고 내가 자주 가는 도서관이 그 마을에 있다. 그러니까 도서관에 가려면 도로 하나를 건너고, 여러 카페와 슬그머니 전세가 궁금해지는 주택을 몇십 채 지나야 한다.

내 것과 남의 것이 분명하게 가려지는 순간이다. 자기비하는 아니지만 결국엔 내가 흙길을 좋아하듯 어쩔 수 없는 태생적 끌림이 있다. 깨끗한 바닥보다 이따금 돌이나 꽃이 있진 않을까 바닥을 내려다봐야 하는 길이 재밌다는 말이다.





또 한 가지, 내가 흥미롭게 느끼는 것은 도서관마다 동네의 특징이 묻어나 있다는 점이다. 이전에 살던 곳은 시장이 있고 낮은 집이 많던 곳인데, 도서관은 디지털 콘텐츠를 내세우지만 종이가 누렇게 바랜 오래된 책이 많았다. 버스를 타고 가야 하던 주상복합 아파트 옆에 있던 도서관은 라이프스타일 매거진과 베스트셀러가 주를 이뤘다. 아, 그곳에서 친일파 명단이 쭉 나열된 두꺼운 책을 재밌게 읽었다. 그리고 요즘 내가 자주 가는 도서관은 완공한 지 얼마 안 된 만큼 책의 수도 적다. 하지만 작가와의 만남이나 아이를 위한 프로그램을 잘 운영하는 편이다. 게다가 복도에 무려 안마 의자가 있다는 사실! 이유는 모르겠다.


도서관에서 보고 싶은 책을 빌리듯, 필요한 서비스를 동네에서 해결하는 건 생각보다 묘한 쾌감이 있다.



슈퍼에서 받은 포도 모양 쿠폰을 모아 휴지와 맞바꾼 기분이랄까? 최근에 나는 주민자치센터를 지나가다가 전단 하나를 발견했다. 자치센터에서 운영하는 요가 수업으로 일주일에 두 번, 석 달간 이어지는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그 내용을 기억해두었다가 스스로의 체력에 질려버렸을 무렵 화풀이하듯 신청했다. 내가, 이것도, 안 하면, 인간이, 아니다.

☑ 수·금요일
☑ 오전 9시 30분~11시 30분
☑ 4만5000원(현금)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다는 게 이런 뜻이었던가. 어릴 땐 내가 강을 건너는지 바다를 건너는지 신경도 안 썼는데, 스물아홉이 되자 내가 모르는 세계에 발을 담근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처음 깨달았다.


4월 첫째 주 수요일, 그날이 왔다. 나는 그 전날 저녁부터 몸이 아픈 것 같았다. 친구들에게 요가를 신청했다는 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렇게 무거운 걸음으로 복지회관에 도착해 문을 열었을 때… 그야말로 회색 물결의 향연이었다. 할머니는 물론이고 몇 분의 할아버지를 포함해 약 30명의 어르신이 같은 자세로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나는 5분 정도 지각한 탓에 제일 끝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요가 선생님은 나이가 좀 있으셨는데, 화장과 의상이 유튜버 박막례 할머니만큼이나 화려했다. 순간 에어로빅 수업인 줄 알았다. 나는 제발 눈에 띄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최대한 앞자리의 할머니를 따라 하며 열심히 했다.
그러나 초급, 중급, 고급반이 따로 나뉘지 않은 수업인지라(역시 짬뽕마을!) 시간이 지날수록 고난도 동작이 계속됐다. 선생님이 매트 사이를 오가며 말했다. “자, 무리하지 마세요. 할 수 있는 사람만 따라 하세요. 왼쪽 다리로 중심을 잡고, 양팔을 벌려 몸을 서서히 앞으로 기울ㅇ…!” 나는 선생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쿵 하고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 순간 몇십 명의 시선을 동시에 받는 기분이란! 옆에 있던 백발의 할머니와 앞에 있던 아주머니가 계속 괜찮으냐고 묻는데 정말 안 괜찮았다. 99%의 확률로 제일 젊은 내가 그중에서 제일 못하는 게 제일 부끄러웠다.
나는 그냥 수업 마지막에 있는 명상 시간이 가장 좋았다. 정자세로 앉아 눈을 감고 있으면 선생님이 우주가 떠오르는 신비로운 음악을 틀어주었는데, 기계가 낡았는지 자꾸만 CD가 튕겨서 계속 처음부터 반복해서 들어야 했다. 수업이 끝나자 나는 넋이 나간 채로 앉아 있었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다음 수업에도 꼭 오라고 했다. 내가 안 올 걸 미리 알고 있었나 보다.

그렇게 인간임을 포기하고 3주째 요가를 ‘짼’ 나는 커피 리필이 되는 동네 카페에서 마감을 하고 있다. 여러 프랜차이즈점과 개인 카페를 돌아본 결과, 재즈 라디오를 틀어주고, 스콘 정도의 간단한 베이커리가 있으며, 무엇보다 앞서 말한 아메리카노 리필을 1000원에 할 수 있는 이곳이 최적의 공간이다. 주인아주머니와의 우정으로 카페 홍보라도 하고 싶지만, 죄송하게도 아직까지 카페의 이름을 모른다(와이파이 비밀번호는 외웠다). 이 글을 끝내놓고선 간판 한번 보고 오겠다.

친구들은 동네에서 잘 벗어나지 않는 나를 보며 늘 묻곤 한다. “아니, 집에 꿀 발라놨어?” 그럴 때면 바보같이 웃으며 넘어가지만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내 꿀단지는 동네 곳곳에 숨어 있어서 찾아 다녀야 해, 친구야.’ 나는 신호등 앞 과일 트럭 아저씨가 언제 출근하는지 알고, 안내판을 무시하고 우체국으로 가는 지름길도 알고 있으며, 학의천에서 몇 월에 야외 공연을 하는지도 안다. 누군가는 그런 것들을 알아서 무엇 하느냐고 따질지 모른다. 그러나 내게는 집 안만큼 집 밖의 환경도 중요하다. 예전엔 1층의 내 방에서 바깥 소리를 듣고 있으면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집 밖에서 얻은 기운으로 집 안에서의 시간을 버티는 것 같다.


혼자서 방에만 머물면 사회와 단절되듯, 동네의 변화에 무감해지면 무심한 주민이 된다. 그런 주민이 모이면 무심한 마을이 되고, 또 그런 지역, 그런 나라가 된다. 하다못해 아파트 게시판에 붙어 있는 공지도 무시해선 안 된다. 무엇이 잘됐고, 잘못됐는지 우리는 눈과 귀를 활짝 열고 살아야 한다.


오늘도 인덕원 수상한 여자는 학의천을 느리게 오가며 강아지 뒤꽁무니를 따라가고, 남의 마을 도서관까지 가서 그날에 원하는 지식을 골라 얻는다. 좋아하는 나무는 한 번 더 보고, 수개월째 주차된 자동차를 보며 이미 머릿속으로 추리소설 한 편을 쓰고 있다. 아마 경찰보다 순찰을 더 자주 하는 것 같은데, 그럴 때마다 평범한 이 동네가 참 꾸준히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바라건대 이 글을 본 당신도 동네의 장점을 찾아봤으면 한다. 일단 커피 리필이 되는 카페가 있다면 좋은 동네로 인정하시라.

P.S. 카페 이름은 ‘커피볶는자유’. 음, 몰랐던 게 나은 것 같다.




이혜인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다. 6년째 에디터 일을 하고 으며, 지금은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또한 장롱Jangrong이라는 패션 브랜드도 운영하고 있다. 얼굴을 모르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내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 언젠가 책으로 어서 출간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