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dmark wordmark

logo logo

20세기의 여자

A Woman of the 20th Century

20세기의 여자

Editor.Hyuna Lee / Photographer.Juyeon Lee Knock, Please

33세 / 해란

포토그래퍼


Conditions

지역 서울시 용산구 후암동
구조 다세대빌라 투룸
면적  36㎡(11평)
보증금 1000만 원
월세 40만 원

 

Room History

 

21세 미국 로스앤젤레스 패서디나 콘도미니엄(관리비 150달러)
25세 미국 브루클린 클린턴 힐 셰어하우스(월세 800달러)
30세 서울시 용산구 후암동 다세대빌라 투룸(보증금 1000만 원, 월세 40만 원)

 

 

자주 만나는 친구가 있다. 그녀는 내가 아는 사람 중 옷을 제일 잘 입는다. “오늘 입은 옷 예쁘다!” 말하면 언제나 똑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이거 우리 엄마 거야.” 잡화점을 떠올리게 만드는 자취방에 가도 마찬가지다. 오래된 소품, 식기, 액세서리 등을 관찰하다 보면 시간은 20세기로 끝없이 거슬러 올라간다. 1988년에 태어난 그녀의 취향은 어디서부터 쌓여왔을까? 기원은 1952년생, 동네에서 알아주는 맥시멀리스트인 어머니로부터 출발한다.



매번 인터뷰 사진 촬영하다가 반대로 당해보는 건 처음이지? 기분이 어때?
너무 기대되고 신나! 나 정말 관종인가 봐.

만나면 늘 하는 말, 오늘도 해볼게. “옷 예쁘다, 엄마 거?”
매일 “응!”이라고 했는데, 오늘 입은 옷은 산 거다! 촬영하다가 한남동에 ‘페르마타’란 숍을 알게 됐는데, 엄마가 좋아하실 것 같아서 모시고 간 적이 있어. 역시 엄마가 너무 마음에 들어하시더라고. 구경하다가 이 옷을 보고는 나랑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추천해주셨어. 그런데 가격이 내가 구입하기에는 고가였지. 28만 원 정도? 그래서 안 사려고 했는데, 엄마가 이런 옷을 사두면 여러 해 잘 입는다며 사주셨어!

엄마 옷은 아니지만, 결국 엄마가 고르고 사준 거네.
응, 난 옷을 못 사.(웃음) 신발, 가방, 액세서리도 마찬가지고.

어떤 물건이든 사려다가도 망설이게 되고, 꼭 엄마에게 허락받아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잖아. 그런 부분이 답답하진 않아?
오히려 어릴 때 잘 정착된 습관이라고 생각해. 초등학생 때 엄마랑 언니랑 백화점에 간 적이 있는데, 당시 유행하던 키치한 느낌의 스웨터를 사달라고 졸랐어. 엄마랑 언니가 촌스러워서 안 된다고 말렸는데, 엄청 떼를 써서 결국 샀지. 그런데 1년이 지나니까 못 입겠더라고. 심지어 그 옷이 엄청 고가였거든! 그런 경험이 몇 번 반복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뭘 안 사게 되더라고. 심지어 미국 유학 시절에는 언니랑 페이스 타임 하면서 쇼핑했어. “언니 이거 어때? 한번 봐줘” 하면서.

신기한 점은 물건은 잘 안 사는데도 해란만의 스타일이 있다는 거야.
그래? 스스로 내가 어떤 스타일인지 생각해보지는 않았어. 물론 이런 뒷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세 보인다거나, 오라가 있다는 말을 종종 하곤 해. 그런데 실질적으로는 엄마가 가진 걸 조각조각 이어서 나한테 붙인 거지.(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나만의 취향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요가랑 사진. 엄마와 언니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 게 거의 없는데, 이 두 가지는 가족의 테두리 밖에서 나를 표현하는 유일한 거야. 생각해보니 요가복은 가끔 사더라고. 뭐, 이건 필요에 의한 소비니까!

내가 그날 입은 옷에 관해 물어보면 엄마가 언제 샀는지, 몇 살 즈음 입었는지도 알려주잖아. 그걸 듣는 재미가 있어. ‘옛날 옷인데 어쩜 저렇게 세련됐지?’ 하는 생각도 들고.
맞아. 완전 타임리스, 클래식! 요즘 뉴트로*가 유행이어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는데, 엄마가 유행 타지 않는 물건을 잘 고르시거든. 내가 본가에 가면 보물찾기하듯이 엄마가 안 쓰는 물건을 옷 방에서 찾아내. 가져가려고 보여주면 엄마는 “어머~ 그걸 어디서 찾았어?” 할 정도로 한참 안 썼는데도 언제 어디서 구입했는지, 언제 어떻게 입었는지 다 기억하셔. 그게 너무 신기해!
(*새로움(new)과 복고(retro)를 합친 신조어로, 복고를 새롭게 즐기는 경향을 말한다.)

여전히 옷에 애정이 많으시구나.
응, 엄마는 아직도 옷 방에 옷을 한 벌로 쫙 코디해서 걸어놓으셔.(웃음) 그렇게 여러 벌 만들어놓고 마치 백화점에서 쇼핑하듯이 지나가다 “내일은 이렇게 입어야겠다~” 하시지. 그런데 그 코디가 내가 봐도 멋있어. 엄마가 정말 센스 있구나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아쉬운 마음도 들어. 엄마가 지금 태어났으면 완전 블랙핑크 제니 뺨치는 패셔니스타인데!



11년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한 후 속초 본가에서 지내다가 서울로 왔잖아. 집은 어떻게 구했어?
집을 구하려고 처음 이태원에 갔는데 외국인이 많은 걸 보고 ‘여기가 내가 살 동네구나’ 싶었어. 미국에서 오래 지내서 그런지 오히려 편하더라고. 해방촌에 한 달짜리 방을 구해놓고 계속 집을 알아봤는데, 그쪽은 젠트리피케이션이 심해서 가격이 안 맞았어. 그렇게 점점 밀려나다가 후암동까지 온 거야.

그래도 이 집이 마음에 든 거지? 벌써 여기서 산 지 2년이 넘었잖아.
밀려나서 온 곳이지만 오히려 좋았어. 고향이 속초라 어디서든 설악산이 보이는 게 좋았는데, 여긴 남산이 바로 뒤에 있잖아. 또 하나의 장점은 이곳에 오래 산 현지인이 많다는 거야. 그리고 동네가 적당히 후졌고. 딱 내가 좋아하는 정도로. 그렇다고 너무 천박하지도 않으면서 말이야.

아, 살짝 후지지만 천박하진 않다?(웃음)
응! 이 집에 딱 들어왔는데 사람이 살 것 같은 느낌이 나는 거야. 인간미가 있는 집이랄까? 1.5층이라 계단을 오르기 힘들지도 않은데 창문 밖 풍경은 좋고, 빛도 잘 들어오고, 가격도 저렴하니 딱이었지.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40만 원이라니, 투룸인데 이 가격은 찾기 힘들지. 부족한 건 고쳐가면서 살았고. 그런데 아직도 창문 바깥 문이 제대로 안 잠기네.(웃음)



이전 세입자가 쓰던 침대, 세탁기, 냉장고, 가스레인지, 책장 등을 들어올 때 싸게 샀다고 들었어. 본가에서 가져온 물건도 많고. 난 새 물건 사는 걸 좋아해서 선뜻 이해가 안 가는데, 누군가 쓰던 물건을 사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이유가 있어?
음, 난 그 물건이 나를 만날 때까지 살아남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튼튼해서든, 어떤 주인을 만나 사랑을 많이 받아서든, 어떤 이유로든 살아남은 거야. 난 그런 애들이 좋아. 약간 묵은 김치 같은 느낌이랄까? 한번 해를 넘긴 숙성된 물건인 거지!

그 점도 후암동이라는 동네랑 비슷하네.
맞아! 동네든 물건이든 염도가 있어. 좀 짜.(웃음) 참, 내가 뭔가를 소비할 때 스스로 못 믿는다고 했잖아. 왜냐하면 항상 엄마랑 언니에게 승인을 받고 뭔가를 해왔으니까. 그래서 오래된 물건이 나한테 오면 마치 이전에 쓰던 사람이 내게 이 물건을 계속 써도 된다고 허락해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요즘 사람은 소비로 자신을 정의하려는 경향이 크잖아. 예를 들어 인스타그램에 특정 브랜드 제품 사진을 올리면 내가 그 브랜드와 비슷한 분위기의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처럼 말이야. 물론 전혀 관계없진 않겠지만 요즘은 유난히 심하다고 느끼거든. 그런데 해란은 소비로 자신을 정의하지 않는 것 같아서 늘 신기했어.
어릴 때 소비 개념이 확실히 잡힌 것 같아. 엄마는 소소하게 돈을 쓰기보다 한 번 살 때 좋은 거, 값이 나가는 걸 사라고 하셨어. 어떤 물건이 너무 좋은데 가격 때문에 흔들린다면 과소비를 하더라도 사라고. 근데 문제는 그 돈이 없다는 거야.(웃음) 좋은 건 나도 알아. 다만 돈이 없는 거지!

에이, 해란이 돈 쓰는 카테고리는 따로 있잖아. 피부과!
그건 내 몸에 흡수되는 거잖아! 나는 그런 데 돈을 안 아껴. 옷이나 다른 물건은 안 사도 될 정도로 너무 많아서 그렇기도 하고. 돈을 써도 집에 물리적으로 남지 않는 게 좋아. 안 그래도 물건이 많은데, 돈을 써서 집에 짐이 늘어나면 너~무 어지러워. 그나마 유일하게 남기는 게 사진집이지.

만약 집을 마음대로 꾸밀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추구하고 싶은 스타일이 있어?
옐레나 옘추크(Yelena Yemchuk)라는 러시아 사진가를 닮고 싶어.​ 미국에 있을 때 이 사람 밑에서 인턴십을 하기도 했어. 좋아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인데 사진은 말할 필요도 없고, 예쁘고, 밴드 스매싱 펌킨스 멤버랑 사귀기도 했지. 요즘 말로 완전 인싸였던 거야. 집에도 가볼 기회가 있었는데, 오래된 물건이 가득해서 골동품점 분위기 나. 내가 돈이 많다면 이 사람처럼 오래되고 좋은 물건을 사서 집을 꾸밀 것 같아. 아, 우리 엄마도 앤티크 소품을 모으는데 귀한 물건이다 싶으면 집으로 데려오는 것 같아. 단순히 예쁘다는 이유도 있지만, 엄마는 정성을 들여 잘 만든 것 크래프트맨십(craftsmanship)에 경의를 표하는 편이야. 그런 점을 닮아가나 봐.

받은 물건이 많긴 해도 집을 둘러보면 확실히 맥시멀리스트의 면모가 보여. 특히 책상 앞 벽이랑 주방 벽에는 각종 사진과 봉지가 가득해. 사진이나 엽서는 그렇다 치고, 비닐봉지는 도대체 왜 모으는 거야?
너~무 예쁘지 않아? 벽에 붙인 물티슈 봉지도 예뻐서 붙인 거야. 어떤 사람이 우리 집에 와서 물티슈 봉지를 왜 붙여놨냐고 묻더라. 예뻐서 붙였다고 했더니 무슨 추억이 있는 물건이냐며 다시 묻고, 또 묻더라. 이해를 못 하더라고.(웃음)

지금 사는 후암동은 <버닝>과 <기생충>의 영화 촬영지잖아. 그런데 영화에서 동네를 소비하는 방식은 굉장히 거칠지. 내가 사는 동네가 영화 속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소비된다면 자괴감이 들 법도 한데, 해란은 오히려 자랑스러워하지. 어느 정도 거리감을 두고 동네를 바라보는 것 같은데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음, 나는 내 포지션을 항상 ‘루키’로 두거든. 난 톱이 되고 싶지 않아. 늘 신인이고 싶어. 그래서 이런 환경에서 사는 게 오히려 좋아!

아,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다면 대상은 됐고 무조건 신인상이다?(웃음)
응, 그래서 난 한남동 같은 부촌에서 살고 싶지 않아. ‘쟨 루키고, 발복 發福할 애야. 기약은 없지만 언젠가 뜰 애야!’ 이런 포지션에 있는 게 행복해.



포토그래퍼로 일하면서 여러 사람의 집을 찍을 일이 많을 텐데, 타인의 집에서 특별히 눈여겨보는 점이 있어? 또는 어떤 걸 볼 때 이 사람이 집을 사랑한다고 느껴?
난 어떤 촬영이든 인터뷰이의 집에서 찍는 걸 가장 좋아해. 물건 하나에도 흔적이 있고, 자신을 드러내는 집이 좋거든. 최근에 어떤 할머니를 촬영한 적이 있는데 식탁보를 직접 곱게 짜셨더라고. 그런 걸 보면 기분이 좋아져. 반면 어떤 집에 가면 ‘여기서 진짜 사는 건가?’ 할 정도로 흔적이 없는 집도 있지.

누가 와서 살아도 이상하지 않은, 호텔 같은 그런 집?
응. 그리고 또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유행하는 디자이너 브랜드 소파, 조명 기구 등 비싼 물건만 채워놓은 집도 있지.

프리츠 한센 조명등과 세븐 체어, USM 캐비닛으로 치장한 그런 집?
맞아!(웃음)

좀 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난 그런 집을 보는 게 시각적으로 좀 괴롭더라고. 오히려 이케아로 채운 집보다 별로라고 생각해.
무슨 말인지 알아. 차라리 이케아로 채웠으면 ‘아, 이 사람은 실용을 중요시해서 모두 이케아로 맞췄구나’ 할 텐데 말이야. 보이는 것에 돈을 쓰지만 자기 취향이 아닌 거야. 그런 집에 가면 아무래도 아쉽지. 하지만 정말로 그 브랜드 가치를 존중하는 사람들은 눈에 보여. 공간과 사람이 어우러져 나오는 분위기가 있으니까.



해란은 이 집에서 어떤 공간을 제일 좋아해?
여러 군데가 있는데, 해가 들어오는 시간에 따라 달라. 아침에 해가 화장실 쪽에서 들어오거든. 햇빛의 퀄리티가 너무 상~큼하지! 그럼 시원하게 볼일을 보면서 아침을 시작하는 거야. 그리고 그 빛이 들어올 때 주방 창문을 다 열고 커피를 내리지. 그 후에는 보통 요가를 가고. 오후가 되면 해가 옷 방이랑 작업 방으로 들어와서 집 전체가 노란색으로 물들어. 그럼 그 오후 1시의 감성에 취하는 거야. 아, 노을 질 때도 예술이야. 하늘이 물들고, 비행기도 지나가고, 그런 걸 보다 보면 바깥에 보이는 기와집 위로 달도 뜨고‧‧‧.

이야기를 들으니 이 집 구석구석을 사랑한다는 게 느껴지네. 조금 부족해도, 원하는 걸 다 가질 수는 없더라도 내 공간을 아낄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우선 나를 이해하는 게 제일 중요해. 그다음에는 욕심을 내려놓는 거야. 낙심하면서 쓸데없는 에너지 소비를 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봐. 안 써도 되는 에너지잖아. 다만 내가 아까 내 포지션을 루키에 둔다고 말했지? 그래서 항상 올라가고 싶은 목표는 있어야 해. 만족하지만 안주하지는 않는 거지.

나도 해란이 평생 루키였으면 좋겠어. 진심으로.
그럴까 봐 무섭다!(웃음) 그런데 난 잘돼도 항상 루키 마인드일 것 같아. 난 예전부터 항상 내게 무언가 가르쳐줄 수 있고, 자신만의 취향이 있는 멋있는 사람을 찾아다녔어. 나보다 못난 사람이랑은 친구가 될 수 없거든.

자신만의 취향이 있는 멋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데?
보이는 모습으로 판단하기는 어렵고, 이야기를 해보면 알 수 있어. 음, 내가 관심을 거두는 사람은 무언가 하고 싶다고 말만 하는 타입이야.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답답하고 피곤하지. “그냥 해! Do or Die, Bitch!” 난 그런 애들이랑 못 놀아.(웃음) 뭔가 갖고 싶고, 이루고 싶은 게 있으면 고민하지 않고 뭐라도 실행하는 사람들이 멋있다고 생각해. 그런 사람들에게는 고유한 취향이 있다고 생각하고.

해란은 엄마에게서부터 내려온 유산으로 취향의 기반을 다졌잖아. 엄마에게 제일 고마운 건 뭐야?
내 엄마라는 거. 엄마 딸로 태어나서 너무 행복해. 엄마도 가끔 나한테 그러셔. “주변에서 너 부러워하는 친구들 많지 않아?” 그럼 이렇게 대답하지. “부러우면 뭐 해, 내가 엄마 딸인데!” 엄마가 종종 그렇게 칭찬을 듣고 싶어 하시더라고. 난 죄다 감사해. 그냥 엄마가 고마워. 굳이 안 좋은 점이 있다면 엄마가 너무 대단한 존재여서 나는 내 자식에게 이 정도로 못 해줄 것 같아. 그래서 안 낳으려고. 돌려주기엔 너무 큰 사랑을 받았어!

이 아름다운 사랑의 대가 끊긴다고 생각하니 좀 아쉬운데?
아쉬워하지 마. 가슴으로 낳은 우리 고양이들이 있으니까.(웃음)


Conditions

지역 서울시 용산구 후암동
구조 다세대빌라 투룸
면적  36㎡(11평)
보증금 1000만 원
월세 40만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