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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기성세대의 고백

A Confession from an Older Generation

어느 기성세대의 고백

Writer.Jiyoung Bea / Illustrator.Subin Yang Article / essay


인천에서 살다가 서울로 이사를 오면서 정말 오랫동안 집을 알아봤다. 매 주말이면 서울의 집을 알아보는 게 중요한 일이었다. 물론 처음엔 야심 차게 역세권을 중심으로 알아봤다. 그러나 갖고 있는 보증금으로 역세권에서 집을 구하려면 포기해야 할 것이 아주 많았다. 침대를 포기해야 했고, 안전한 골목길과 햇빛을 포기해야 했다. 결국 역세권을 포기하고 말았다.

아파트는 일찌감치 포기했고, 깨끗한 다세대주택이나 빌라 그리고 상가주택 등을 알아봤다. 그땐 그저 깨끗하고 2층 이상, 안전한 골목길, 침대를 놓을 수 있는 방이면 좋겠다 싶었다. 그러다가 한 대학가의 다세대주택을 계약했다. 엘리베이터 없는 5층이라서 그런지 좀 저렴한 편이었는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관리비라는 명목으로 5만 원을 받는 거였다. 관리비는 도대체 무엇인지, 어디에 쓰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어쨌든 그 집은 이전에 대학생이 주로 생활했다고 했다. 건물 주인은 6층에서 살았기 때문에 5층만은 대학생이 아닌 세입자를 원했기에 신혼부부이던 우리가 적합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난데없는 면접 비슷한 시간에 이야기도 오래 나눴다. 조금 치사했지만 그나마 깨끗한 집이었기에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짐을 들이자 그 정도 감수할 만큼의 집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일단 너무 좁았고 모든 것이 이상했다.
 

우선 방이 하나 있고 그 안에 작은 방 같은 게 하나 더 있었는데, 바닥에 타일이 깔려 있었다. 알고 보니 그 방을 두 개로 쪼개어 두 가구에 임대하려고 했다가 너무 좁아서 다시 한 집으로 텄다는 것이다. 양심도 없지! 한 집으로 텄다고 하나, 그나마도 정말 좁았다. 공인중개사는 그 방을 드레스 룸으로 꾸며놓고 살면 좋을 것이라고 했는데, 처음엔 코웃음을 쳤지만 결국 그렇게 했다. 옷장을 들일 수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좁게 들어간 곳(아마도 현관문으로 만들었을 법한 곳)에 책상을 우겨 넣듯 집어넣었는데, 너무 좁고 깜깜해서 의자를 뒤로 움직일 수가 없어서 작업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좋은 점이 하나 있었는데, 일단 대학가 근처라 주변에 저렴하고 맛있는 음식점이 제법 많다는 것이었다. 봄이 되면 술집 앞에서 술 취한 선후배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남편은 혀를 끌끌 찼지만 난 대학 때 기억을 새록새록 떠올렸다. 여름방학이든 겨울방학이든 봄가을이든 마냥 놀던 그 시절의 기억.


“요즘 대학생은 정말 열심히 사는 것 같아. 공부도 열심히 하고 돈도 열심히 벌고.”



사실 그 학교에도 기숙사는 있지만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서 우리 집 주변에 인근 대학생이 많이 거주한다고 들었다. 집값이 저렴하다고 했지만 사실 저렴한 건 아니었다. “비싼데 저렴하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화장실도 좀 웃겼다. 화장지를 쓰려면 왼쪽으로 몸을 심하게 뒤틀어야 했는데, 처음엔 정말 허리가 결릴 정도였다. 싱크대 위치도 좀 이상한 데다 요리할 공간이라곤 없었다. 도마를 둘 데가 없어서 작은 식탁 뒤에 두거나 베란다에 도마를 올려놓고 쓰기도 했다. 정말 미로 같은 곳이었다.
 

집은 추웠으며, 나중에 보일러가 폭발하고 말았다. 화재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너무 무서웠다. 아무튼 그런 집이었는데, 그 동네에선 그나마 그런대로 가성비 좋고 괜찮은 편이었다. 내가 그때 그 동네에 알아본 바로는 그 집보다 훨씬 못한 곳, 이게 집인가 싶은 곳, 곰팡이가 피어 있는 곳, 물이 샌 것이 분명한 곳, 남편 말로는 마피아가 사는 곳 같은 곳, 그런 곳이 그보다 훨씬 더 비싼 보증금을 치러야 했으니까.


이사를 나가는 날까지 집주인은 그야말로 집주인 행세를 톡톡히 했다. 그 낡디낡은 40년 된 집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우리가 무엇을 더 낡게 만들었는지 일일이 지적을 했다. 이삿짐을 꾸리던 사람들이 참다못해 화를 낼 정도였다.
 

집주인 할머니는 내게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내가 알기론 부자인 그 할머니는 복비를 내라고도 했고, 청소를 말끔히 하라고도 지적했으며, 이전에 살던 사람이 뚫어놓은 에어컨 구멍을 메우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계속 앓는 소리를 했다. 이렇게 집을 애면글면 가꿔봐야 푼돈만 들어온다는 둥, 앞으론 전세를 주지 않고 월세로 받을 거라는 둥. 아, 정말 그땐 혹시라도 보증금을 떼일까 싶어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고, 5만 원씩 관리비는 왜 받았느냐고 묻지 못했다. 장판은 너무 오래돼 너덜거려서 사계절 내내 카펫을 깔아놓아야 했으며, 벽지는 합지였는데 그건 그냥 둘 수가 없어 벽지 페인트를 발랐는데도. 
 

어쨌든 난 더 많은 빚을 지고 그 집을 탈출하듯 빠져나와 이사를 갔다. 그리고 이 집을 보러 온 여학생이 잊히지 않는다. “와, 너무 좋아요! 근데 왜 이사를 가시는 거예요?” 그랬다. 그 주변의 집들은 하나같이 그 모양이었고 그나마 너무 좋다는 말을 듣는 곳. 그런 집일망정 너무 좋다는 찬사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다. 엄마가 노후 대비를 위해 다세대주택 매매를 알아보고 다니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혀를 끌끌 차며 말씀하셨다.

“쯧쯧. 아니다, 됐다.”

“왜?”

“저런 데를 어떻게 세를 주겠니? 다 고쳐야 할 것 같은데. 배보다 배꼽이 크겠어.”

“나도 저런 데 살았는데···.”

“그래서 너 힘들어했잖아.”


순간 할 말이 없었다. 나도 저런 데 살아봤으니 너도 살아라 하는 못된 마음이 내 맘속에 있었나 보다. 어쨌든 엄마의 노후 대책 다세대주택은 없던 일이 됐다. 혹독한 시어머니를 겪은 며느리가 더 혹독한 시어머니가 될 확률은? 엄마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처음 서울에 올라와서 방 하나를 빌려 온 가족이 다 같이 살았어. 친척이 놀러 왔는데 아기를 눕힐 데가 없어서 배 위에 얹어놓고 잤어. 그땐 옛날이라 그렇게 살았지만, 요즘 사람들은 그렇게 못 살지.”


아마 나처럼 심보가 못된 사람은 그런 집을 또 지을 것이고, 엄마 같은 사람은 그런 집을 안 짓겠지. 



아마 이런 마음이겠지. 그 주인 할머니 같은 마음. 내 주머니만 생각하는 마음. 그런 못된 심보. 그것이 내 안에 전혀 없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 시절 나를 괴롭히던 기성세대가 되지 않기 위해 기억해야 할 것은 사실 간단하다. 사람 사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당연한 것들이 있음을 기억하는 것. 욕심내지 않는 것. 무리해서 돈 벌고자 하지 않기.

미국발 뉴스를 봤다. 아파트를 두 개 층으로 나눠서 세를 받다가 걸려서 벌금을 왕창 물었다고. 이런 댓글이 있었다. “저거 우리나라 사람 아닌가?” 청년임대주택을 짓겠다고 하면 빈민 주택이라 반대하며 구분 짓는 사람들이 사는 곳, 내 재산이 들어갔으니 조금의 손해가 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겠다며 순식간에 이기적이 되는 부동산 공화국에서, 어느새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나는 반성하는 마음을 가져본다. 



배지영

2006년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오란씨》, 장편소설 《링컨타운카 베이비》, 《안녕, 뜨겁게》를 냈으며, 최근 소설집 《근린생활자》를 출간했다.